70년째, 진정성 있는 실향민 정책 한번이라도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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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런 표현을 썼다. “잠시 피란(避亂) 나왔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되었다고….” 전쟁 통에 남으로 잠시 피신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주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못하고 종전과 휴전이 되면서 주저앉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랬다. 1951년 1.4 후퇴 때 강원도로 내려왔다. 더는 남하하지 않았다. 포성이 잠잠해지면 어서 돌아가려고 북한에서 지근거리인 38선 근처 동네에 머물렀다. 그런데 휴전협상으로 38선보다 위쪽으로 분단선이 확정되면서 발길이 묶었다.

아버지는 피란민이라고 했지만, 광의로 보면 피난민 즉 난민(難民)이다. 용어를 먼저 정리해 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은 피란민을 이렇게 설명한다. “난리를 피하여 가는 백성”, 피난민은 “재난을 피하여 가는 백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전쟁도 재난이기에 두 단어의 구분은 모호하고 어렵게 된다. 국제적 기준으로 보면 난민인 보편적 용어다. 아버지를 비롯해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주민은 전형적인 전쟁 난민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대규모 난민이었다. 이들 난민이 실향민이다. 분단으로 남한에 정착하고 생활하면서 고향 잃은 자로서 실향민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에 가족을 두고 헤어진 상태라는 의미의 이산가족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통칭 1천만 이산가족이라고 하는데 상징적인 의미이지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정확한 통계가 없다. 이북 5도민 출신이 850만이라는 통계도 있는데 그 근거는 이렇다. 1970년 북한 피란민 출신들이 임시호적 취득 시 546만 명의 신청이 있었다. 이후 인구증가율까지 대입해서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률도 고려해야 하는 데 반영이 안 된 수치이다. 학자에 따라서 전쟁 전후 100~120만 명이 월남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1994년 정부 추정치는 40만 명이다. 지금 남아있는 생존자는 10만 선으로 추산한다.

이렇게 숫자의 혼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그동안 실향민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이 인본주의에 입각한 진정성보다 형식에 치우쳤다는 의미이다. 분단으로 인해 그들의 생이별의 고통을 얼마나 인간적으로 받을까라는 인식과 생각이 없다. 전쟁직후야 먹고살기 힘들고 남북 간 대립의 격화로 인해 그렇다 치고 그 이후 남한이 발전되고 국제정세가 변하는 흐름 속에서도 실향민은 루저그룹이었다.

일부 이북출신들이 고위직에 진출하고 이북 5도민 연합회를 만드는 등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주변부 정책에 불과했다. 실제 이북출신 단체들은 관변 단체로 전락했다. 이산가족 정책이나 이슈에 아무런 역할이나 영향력이 없다. 반공 전사 아니면 빨갱이 두 부류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었고 여전히 반공주의가 득세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이산가족은 극단적인 어느 부류도 아닌 보통 사람의 성정을 가진 평범한 시민이다. 이북 5도 지사와 군수 등도 임명된다. 통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런 직함을 만들어놓고 운영한다지만 어색하다. 그게 이북5도민 출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무슨 바늘 구멍같은 기여라도 할까?

많은 실향민이라는 난민들이 바라는 것은 이산가족 상봉 내지 고향방문이었지만 분단 이후 제도적으로 지속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두어 차례 있었고 참여숫자도 한 회 100~200명의 제한된 숫자로 극소수만이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그마저 이제 세월이 흘러 사실 이산가족 1세대는 거의 소멸하여 가고 있다. 최소한 북한기억을 가진 세대의 나이가 70대 중반에 이르렀다. 통일 의지와 비전을 밝히고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과 왕래라는 문제를 제쳐 두고 다른 분야에서 협력이 진정한 화해와 진전으로 갈 수 있을까. 대북문제 해법의 첫 단추가 인간적인 교류의 제도화이다. 이를 기반으로 상호협력 신뢰가 퍼져 나가는 게 정석이다. 독일이 추구한 정책이기도 하다. 독일도 반공주의 아데나워시대 힘을 축적하는 방식의 통일정책에서 70년대 대전환을 이루면서 인적교류를 최우선 정책순위 놓고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분단으로 인한 인간적인 고통을 해소하고자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피란 내려와 난민에서 실향민으로 고단한 삶을 영위하다가 꿈에도 그리는 고향 땅을 가보기는커녕 가족상봉의 기회 한 번 얻지 못하고 201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듯이 실향의 고통을 달래려 피란민 보따리를 풀고 함께 모여 살던 속초 아바이 마을의 이북 출신들도 이제 머지않아 이 세상을 등진다. 아바이 마을이란 이름도 역사 속으로 묻힐 것이다. 북한 난민 1세대인 이산가족 문제는 연원을 따지고 보면 일제 식민지 출발점인 1910년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서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으로 이어지면서 離散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기에 미국, 일본, 중국 등이 다 책임이 있다.

북한의 경직된 태도만 비난할 게 아니라 국제공조를 통해 해법을 도출해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사회에 관심 촉구를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해왔는지 나라를 이끄는 무대에서 목청을 높이는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지도자의 인식이 먼저다. 이제라도 이산가족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치유하려는 지도자가 아쉽다.올해는 6.25 70주년이다.

글 : 신창섭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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