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 보리수 나무 그늘 아래서 단꿈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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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영랑호반에 위치한 보광사에 갔다가 보리수 나무를 만났습니다.스님이 땀에 젖은 채 입구 화단에서 밭을 메기에 ‘저 나무가 뭔가’요 하니 보리수 나무라고 하시더군요.보리수를 듣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제 몸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처님이 집을 나와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나무 아닌가…왠지 성스런 폼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무의식이랄까…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깨달음에 목마른 대중의 입장에서는 화살처럼 꽂혀오는 것이죠.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부활하신 말씀을 듣는 거 같은 맥락이랄까.

그러나 실은 보리수 나무라고 하니 저는 독일가곡 ‘보리수 나무 아래서’가 떠올랐습니다. 학교시절 배운 슈베르트의 가곡이죠. 지금도 멜로디가 입가에서 저절로 멤도는데 특히 저는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었네…’라는 구절이 좋습니다.

그늘이 있어야 단꿈을 꾼다는 것 참 의미있는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표현이죠.태양이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서 꿈을 꾸는 것은 뭔가 안맞는 일이죠.그늘이 그때 부처님의 가피같은 것 아닐까요. 시원한 그늘에서 피서를 즐기는 것도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는것도 단꿈이겠지만 신의 품에서 평화를 얻는 것이 단꿈이 아닐까 여겨집니다.연인의 품도 그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님은 이 나무가 잘자란다고 하셨습니다. 한 20년 크면  너른 그늘이 생길것이라고…그러면 내가 저 보리수나무 그늘아래서 단꿈을 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스님이 ‘ 우리가 가게 되면 누군가 와서 시원한 그늘 아래 있겠죠..“ 하신다. 마치 마음을 들켜 버린 듯 했습니다.그렇구나 세월을 가는거니 그때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슈베르트는 성문앞 우물곁에 서 있는 한그루 보리수를 노래했지만 저는  보광사 연지 옆에 서 있는 보리수를 노래합니다. 절집 입구에서 내 마음을 붙들어 매고 나의 단꿈을 찾게 만든 보리수 늘 부처님 처럼 서 있겠죠.

그렇게 뜨겁던 여름도 갑니다. 그늘을 찾아 헤메던 나의 여름이 참으로 나약해 보였습니다.다음에 보광사에 갈 때는 쑥 자라 있을 보리수 나무처럼 제 마음도 한뼘 더 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그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는 꿈을 돌아온 비오는 창가에 기대어 지금 그리고 있는 중입니다.그리고 가을에는 ‘ 그 그늘’을 붙잡고 빡세게 기도를  해야겠다.

김형자(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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