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고찰 영랑호 보광사 역사적 사실은 조선시대 한씨 부인이 증거하고 있다.사랑이 지극한 부인 한씨는 남편 나업을 위해 사후에 목조지장보살상을 조성해 보광사의 전신인 금강산 안양암에 모셨다.1654년이다.
나업은 벼슬이 종1품인 승록대부에 오른 인조시대 내관인데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한거나 다름 없다.1938년 대홍수로 안양암이 통째로 유실되는 비극적 상황에서 지장보살상만 유일하게 남아 1938년 보광사로 이건해 역사적 승계하게 되었다.
역사적 기록만 있던 사실이 2017년 드디어 나업과 한씨 부인의 합장묘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보광사의 스님들과 사부대중들은 이에 2021년 경기도 일영계곡 산자락에 있는 묘소에 작은 비문을 세우고 매년 참배를 하고 있다.
28일 일요일 오전 8시 보광사 하심회 회원들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봄볕이 좋고 산하는 연두색으로 물들어 싱그러웠다.미시령을 넘고 홍천을 경유 화도에서 길을 바꿔 송추로 향했다. 송추 초등학교 삼거리에서 장흥방향으로 좌회전 하고 다시 좌회전을 하니 공릉천 유원지 계곡이 보였고 좀더 가서 산자락 아래 차를 세웠다.
산은 유순하게 보였지만 따스한 기운이 몸을 녹이는 듯했다.어떻게 해서 한씨 부인과 나업이 이런 골짜기에 묻히게 되었을까? 그 당시만 해도 첩첩산중 길도 없었을텐데..하는 의문이 들었다.스님은 이 언저리에 청주 한씨 문중들 묘가 자리하고 있고 묘자리 발견도 문중에 수소문해서 알게 되었다고 일러준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니 산자락에 묘소들이 이어져 자리하고 있었다. 산세의 푸근함과 하천을 등지고 있는 지기와 형세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는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2017년 첫 방문 당시 봉분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석물도 기우뚱 기울어져 있고 엉망이었다고 한다.이들 존재를 까마득히 모르고 오랜 세월 돌봄 없이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제법 높은 자리 벼슬을 했지만 역사기록이나 문중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듯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묘소의 지리적 위치도 그런 추측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화려하지 않고 조촐한 모습의 봉분이 잔잔하게 가슴을 울린다. 묘소의 겉모습이 그래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 흐르는 사랑 이야기가 찐하게 전해오며 가슴을 울리고 있기에 그렇다. 지금도 두사람이 내밀한 언어로 나무위의 새처럼 속삭이고 있는 듯 했다.
조계종 산하 많은 사찰이 역사적 유래와 출발 서사를 갖고 있지만 보광사는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서사를 품고 있다는 점이 차별적이다.지극한 사랑과 헌신으로 사후에도 남편을 위해 부처님을 모셨다는 스토리는 박제화되고 상업화된 사랑이 범람하는 시대에 훈훈한 감동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종교가 지향하는 품이 결국 바다같고 항하같은 사랑이라고 할 때 400년 보광사 한씨 부인 사랑 스토리는 시공을 넘어 심금을 울리고도 남을 역사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민호스님과 하심회 회원들은 겨우내 쌓이고 널부러진 낙엽를 모으고 나무가지를 정돈하고 잡초를뽑아 냈다. 제조제도 뿌려 여름날 잡초가 못자라게 조치도 했다. 그리고 나서 과일을 놓고 촛불을 켜고 잔을 올리고 삼배를 올렸다.
보광사에서 그동안 봉분 형태를 복원하고 석물도 정위치 시키고 주변을 정돈해 2021년 안내비문을 세웠다. 단아한 목조지장보살상은 보광사의 역사적 증거인데 그 주인공을 묘소를 찾아 냈다는 것은 보광사 역사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367년만에 쾌거라고 할 수 있다.
보광사 관계자는 “ 묘소 전역을 좀더 정비하고 역사적 발굴을 정리해서 보광사 한씨 부인의 스토리를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알리고 역사적 정체성을 세우는 작업을 차근차근 해 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송추에서 점심을 먹고 속초로 돌아오는 국도변의 산과 하천에 청명함이 눈부셨고 철정 휴게소에 잠시 쉬며 먹은 아이스크림의 맛이 무척 달달했다.
신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