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에 온지 50년이 되었으니 토박이나 다름없죠.보광사는 그 보다 더 오랜 인연이죠.” 인흥리 마을회관 뒤편 단층집에 살고 있는 이춘자씨는 두가지 인연을 이야기했다.
평택이 고향인 그는 인흥에 정착하기 전에 속초에 살았다.속초여고를 나왔다.부모님이 속초로 오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속초생활하면서 절에 다녔다.1968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낙산사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후 건봉사에 계시던 노보살님이 보광사로 오면서 인연을 맺었다.노보살님은 정말 따스한 분이었다고 추억한다.
“속초 여고 졸업하고 시청에 들어갔는데 1968년 해일 때 새마을 사업 관련 업무한 게 기억에 많이 남지요” 1968년에 우리 지역에 대규모 해일이 닥쳐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그 여파로 속초 .천진. 장사동 등지에 구호주택이 들어섰고 이춘자씨는 관련 업무를 맡았다.
이후 시청에 다니던 남편과 결혼에 인흥으로 들어와 4남매를 나아 키웠다.딸 둘은 서울에 있고 하나는 뉴욕에서 다들 자리잡고 잘살고 있다.효심 지극한 외아들(우경찬)은 수원에 살고 있다.
“저번에도 아들이 와서 태풍으로 무너진 뒤란을 다 치우고 해주고 갔어요.늘 자주 못 오는 걸 안타까워하죠. 올 봄에는 서울 딸네 집에서 오래 머물면서 병원치료를 받았으니…”
남편과 사별한 이춘자씨는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하다.홀로 있는 적적함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방안 곳곳에 손잡이 시설을 해 놓은 모습이 앞으로 닥칠 고령화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 하다. 그만큼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출입구 벽면에 ‘불자의 집’이란 표찰이 인상적이다.“ 지난번에도 보광사 행사에 나갔다가 먼발치서 보고 그냥 돌아왔습니다.몸이 이러니 자유롭게 갈 수 없는 게 안타깝죠”
이춘자씨는 인흥에서 7번 국도까지 걸어 나가 버스를 갈아타고 보광사를 가던 시절을 추억했다. 그래도 속초에서 가게를 할 때는 범바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자주 갔었다고 회고한다.그렇게 보낸 세월이 60여년, 그의 마음속 불심의 깊이를 헤아리는 척도이기도 하다.
신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