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일생을 두고 이루고픈 꿈이 하나 있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주신 사제서품 모토를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성서 모토를 제가 선택한 줄 알았습니다. 제가 사제 서품식 전에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서품 성서말씀이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소명으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주 팔복동성당에서 사목할 때입니다. 동네 쓰레기장이 된 폐쇄된 노동자의 집이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집을 활용하기 위해 모본당 신부님도 반대하는 분가를 했습니다. 공단지역이라 신자도 적고 사제 한 사람 성무활동비도 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발령을 받고 찾아간 노동자의 집은 동네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쓰지 않는 공터에는 호랑이가 새끼를 쳐서 나가도 모를 만큼 잡초가 우거져 있었습니다. ‘순명’이라는 말씀이 한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은 없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노동자의 집 사무실과 회합실 벽을 터서 성당을 마련했습니다. 감실을 급하게 설계해서 만들고 제대와 성가 번호판은 동산동 성당 창고에서 가져왔습니다.
분가 첫 미사를 드리고 전신자 나눔 잔치를 했습니다. 두 번째 주일은 제 영명축일이었습니다. 연거푸 두 주일을 전신자 나눔잔치를 했습니다. 한 주당 10만 원 정도의 준비비가 들어갔습니다. 먹는 데서 정이 난다는 말씀대로 매주 전신자 오병이어 나눔잔치를 했습니다. 70여명 신자에서 6개월 만에 120여명의 신자가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교구에서 선교대상을 받았습니다. 매주 전신자 나눔잔치가 효과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전신자 나눔잔치 부식비는 빈첸시오회에서 폐품을 수집해서 마련했습니다. 1년 정도 매주 나눔잔치를 하자 자매님들이 그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매주 반찬을 준비하는데 ‘무얼 준비할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번득 지혜를 주셨습니다. 빈첸시오회에서 부식을 마련해 주고, 반별로 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바꾸자 불평이 사라졌습니다.
빈첸시오회의 중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매주 방문하고 전신자 나눔잔치를 1년 정도 하자 본당 분위기가 초대교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시샘하듯 하루 밤 사이 집중폭우가 340mm가 쏟아졌습니다. 성당이 30Cm 정도 물에 잠겼습니다. 4시간가량 신자들과 양동이와 바가지로 물을 퍼냈습니다. 고백소 물을 퍼내던 형제님이 바가지로 양동이에 물을 퍼 담는데, 양동이에 물이 차지 않아 이상하다 하고 양동이를 들었더니, 콩나물 시루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너무 허요. 병 주고 약 주고 허내요. 양동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주시지 콩나물시루를 주셔서 물 퍼내다가 배꼼 빠지게 만드십니까.”
한 자매님의 농담에 물을 퍼내는 성당이 웃음바다로 출렁였습니다.
훌쩍 한 달이 흘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고 아파트 사제관에 가기 전에 성체조배를 합니다. 갑자기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영화자막처럼 흘러갔습니다. 고물상을 하셨던 아버지, 그래서 엿장수 아저씨들과 함께 생활. 초등 4년 때 경기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두 달 후 아버지 돌아가심. 정규중학교 대신 검정고시를 보는 고등공민학교 입학, 검정고시 낙방, 슈퍼마켓 점원생활, 고입검정고시 합격하고 남원 성원고 통학. 고3 때 정규수업 마치고 돌아와 어머니 병수발, 수능 한 달 전에 어머니 돌아가심. 서울 시립대 국어국문학과 야간 7.8:1 낙방, 방위생활, 천주교 세례 후 가축병원 근무, 과수원과 돼지농장에서 일함, 남한산성 아래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나무를 불 떼는 화부생활, 학원재수생활 후 신학교 입학. 학부를 마치고 휴학 중에 한센인 공소에서 생활, 시골 임실성당 첫미사, 첫 본당 시골 수류성당, 100여명 신자 캐나다 교포사목, 기초생활수급자가 가장 많은 전주공단지역 팔복성당 사목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아하!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이 사제서품 모토를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구나. 이 말씀을 주시려고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가난한 삶을 살게 하셨구나!”
저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매일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저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농민이었습니다. 농민과 함께 살기 위해 생태마을공동체를 진안부귀공소에서 시작했습니다. 생전 처음 농사를 짓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재와 인부를 직접 관리하며 집을 짓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더욱이 목조주택 42평, 40평, 황토 흙부대집 12평, 저온창고 12평, 생태화장실, 비닐하우스 2동, 비가림하우스 200평 등을 16개월 만에 직영으로 완공했습니다. 업자에게 맡겨서 짓는 것도 16개월은 무리인데, 혼자 직영을 하면서 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덕분이었습니다.
자급자족 공동체 건설을 위해 블루베리 농사를 지었습니다. 조생종 중생종이 겹치는 시기, 중생종과 만생종이 겹치는 보름정도는 새벽 6시 미사를 마치고 해질 때까지 블루베리 수확을 해야 합니다. 3시부터 겨울옷을 입고 저온창고에 들어가 택배배송작업을 합니다. 많게는 3-40개를 포장하는 날은 넋이 나갈 지경입니다. 우체국에 시간을 맞추는 택배배송작업은 삶이 전쟁터 같다는 말이 떠오르게 했습니다. 130Kg 정도 블루베리를 따는 날에는 새벽 2시-3시까지 선별작업을 해야 합니다. 저온창고에 넣었다가 다음날 작업을 하면 블루베리에 물방울이 생겨 배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그 날 선별작업을 마쳐야 합니다.
그런 날은 사고로 목을 세 번 다쳐서 생긴 목디스크 때문에 진통제를 먹고 잡니다. 평화집회에서 백골단에 밀려 목을 다치고, 평화운동 현장에 가는 고속도로에서 4중 충돌, 농민주일 마치고 돌아오다가 운전자가 졸아서 폐차를 시켜서 목디스크가 고질병이 되었습니다. 자다가 왼손이 사라집니다. 잠결에 놀라 오른손으로 더듬거려 왼손을 찾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잠자리에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교님께 자다가 왼손이 사라진다는 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본당으로 발령이 나면 저를 믿고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식구들이 공동체를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살기 위해, 농사를 혼자 지을 수 없기에 생태마을 공동체를 시작했지만 고난과 시련은 산 넘어 산처럼 다가왔습니다. 교구에서 집과 토지를 교구로 이전하고 교구 이름으로 생태마을을 하라는 지침이 내려 왔습니다. 은퇴를 앞두신 이병호 주교님께서 ‘최신부님이 원하는 대로 처리하라.’는 말씀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총대리 신부님이 집과 땅을 교구로 이전하라고 강한 압박을 가해 왔습니다. 공동체 식구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신부님, 총대리 신부님의 권고대로 교구에 집과 땅을 다 이전했을 때, 교구에서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가야 하는데, 누가 와서 공동체를 살려고 하겠습니까.”
이런 공동체 식구들의 결론을 때문에 집과 땅을 교구로 이전하는 것을 미루었습니다. 그러나 교구 관계자들은 ‘사심이 있다’며 공개석상에서 화를 두 번이나 냈습니다. 이는 극심한 인격모독이며 언어폭력이었습니다.
집과 땅을 이전하라는 것은 생태마을 공동체를 정리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습니다. “최신부님이 원하는 대로 처리하라”고 하셨던 은퇴하시는 주교님께 이 사실을 보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고자질 하는 것 같아서 교구에 집과 땅을 다 이전하고 생태마을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농민과 사는 꿈은 미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과 사는 꿈은 죽는 날까지 품고 가야할 소명입니다. 신학생 현장체험 때 토마스 쉼터 행려자 무료급식소에서 한 달 생활을 했습니다. 언젠가 나도 무료급식소를 해야 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배 신부님을 통해서 이미 교구에 행려자 무료급식소인 요셉의 집을 설립해 주셨습니다.
까리따스 수녀회에서 20년 넘게 고아원을 했던 수녀님이 에콰도르 수녀회로 적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한국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에콰도르에서 설립한 수녀원이었습니다. 23년 5월에 에콰도르 수녀원으로 이적한 수녀님이 무주성당을 찾아오셨습니다.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나누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꿈이 무료급식소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언제든지 대환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복용하고 있는 우울증 약을 끊기 위해 ‘휴양을 신청하고 쉬게 하시는 이유가 무얼까?’ 종종 묵상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우울증 약을 끊고 에콰도르에 가서 ‘좀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점심도시락을 만들어 나누는 일을 하라고 휴양을 주셨구나.’ 교구 요셉의 집은 누구나 가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더 가난한 에콰도르에 가서 무료급식을 돕는 일은 소명을 받은 사람이 가야 합니다. 에콰도르 수녀회로 적을 옮긴 수녀님이 무주까지 저를 찾아오신 이유였습니다.
8개월 동안 매일 묵주기도 20단을 바치면서 휴양할 곳을 인도해 주시라고 성모님을 통해 은총을 청했습니다. 천주교 쉼터가 아니라 사찰을 쉼터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광주신학교 입학동기 형님 신부님이 관장으로 있는 쉼터를 알아보았습니다. 사정이 어렵다는 답이 왔습니다.
3개월 전에 안부 전화를 드리고 2달 전에 속초 보광사를 찾아왔습니다. 25년 전부터 호형호제하는 형님 스님께 제가 1년 휴양할 것 같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방 하나 달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제 마음을 읽고 답을 주셨습니다. ‘왜 신부님이 사찰에서 쉬고 있냐.’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형님 스님의 배려에서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도우심이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 방 하나 줄게 여기서 지내요. 자전거도 3대 있고, 바로 영랑호라 산책하기도 좋고, 조금 더 나가면 바다예요. 요즘 유행하는 맨발 해변걷기 하기도 좋아요.”
목을 다쳐 한 달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만난 누님 수녀님이 계십니다. 저를 생각하면 애잔하고 애틋해서 마음이 아리다는 수녀님이십니다. 그 수녀님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신부님께서 속초에서 은퇴생활을 하십니다. 은퇴신부님께서 보광사를 처음 찾아오실 때 여러 간식거리를 챙겨 오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고백을 3시간 넘게 잘 들어주신 자상하고 인자하신 아버지 같은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신부님과 함께 글라렛 선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를 처음으로 방문을 했습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무료급식소가 문을 연다는 것이었습니다.
밥 짓는 성자
추석 연휴가 끝나고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무료급식소가 문을 여는 날입니다. 서둘러 세수와 면도를 합니다. 6시 40분쯤 스님께 말씀 드리고 저온창고에서 쌀 한 포대를 자전거에 실고, 제 시집 ‘사랑해도 모자란 동행’ 두 권을 챙겨서 달립니다.
중년 아저씨가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마당을 가로 질러 갑니다. 수사님처럼 느껴져 다가갔습니다.
“혹시 수사님이세요?”
“예 그런데요.”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입니다.”
“아 예, 어제 하 신부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울까요?”
“예, 밥을 퍼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교구 신부 아버지가 순두부를 비닐봉지에 개별 포장하고 계셨습니다. 급식을 타로 오시는 분들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저절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제 눈길에서부터 차올랐습니다. 저는 플라스틱 용기에 밥을 꾹꾹 눌러 풉니다. 사제 아버지는 반찬통에 반찬을 담습니다. 손길 하나하나에 정성과 사랑을 가득 얹어 반찬통에 담습니다.
“한 젊은이가 사제가 되기까지 아버지의 인자한 품성과 지극한 봉사가 있었구나.” 저절로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한편으로 저렇게 친절하고 자상하신 아버지, 지극한 봉사를 하시는 아버지가 계신 사제는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울까, 사제는 부모님의 희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몸으로 삶으로 봉사로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수사님이 5시에 일어나 두 가마솥에 밥을 짓고 돼지고기 두루치기와 코다리묵은김치찜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무료급식소를 하신 10여년의 세월, 밥 짓고 반찬 만드는 수행 속에서 성자가 되신 것 같습니다. 밥 짓는 성자를 뵙는 것처럼 행복했습니다. 수사님이 주걱으로 가마솥에서 밥을 푸시고 저는 찜통을 잡아드립니다. 큰 주걱을 한 손으로 잡고 푸시는 솜씨가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 무르익었습니다. 구수한 누룽지를 열십자로 두 번 칼집을 내고 칼로 주걱으로 살살 긁으니 누룽지가 삼격형으로 곱게 떨어져 나왔습니다.
“카아! 달인이십니다. 누룽지의 신이십니다.”
86세의 은퇴신부님께서 급식소를 방문하셨습니다. 은퇴신부님과 수사님께 ‘사랑해도 모자란 동행’ 시집을 사인해서 선물합니다.
“시집을 읽으시다 한 번이라도 가슴 뭉클하면 성인이시고요. 아무런 감흥이 없으시면 그냥 사람입니다. 시집 읽으시고 성인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하하! 성인되기 쉽네요.”
식탁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습니다. 오늘 특별요리인 두루치기, 코다리묵은김치찜, 순부두, 김치에 아침을 먹습니다. 도시락을 들고 오시는 분이 계시면 배식을 합니다. 식사 도중 두 번 숟가락을 놓고 밥과 반찬을 배식했습니다.
7시부터 시작된 배식은 9시경이 되자 뜸해졌습니다. 은퇴신부님이 사제관에 가서 차 한 잔 하시잡니다. 시내를 빠져나와 솔숲을 지나 공소 사제관에 도착했습니다. 만들레차에 과자를 내 놓으십니다. 거실 중앙에 은퇴 신부님 어머니께서 세례직전에 찍은 흑백사진이 신앙의 깊은 세월을 담고 있었습니다. 시 두 편을 탁자 유리 밑에 넣어두셨습니다. “시간이 익어 커피가 되었습니다.” “눈이 조금 오면 낭만, 많이 오면 골치” 시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 만나 저를 사제관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야, 내가 감사하지, 찾아오는 신부도 신자도 없어요. 외로운 은퇴사제관을 방문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하죠.”
다시 무료급식소로 와서 자전거를 타고 보광사로 갑니다. 자상하고 인자하신 아버지 같은 은퇴 신부님과 점심을 먹기 위해 약속 장소로 갑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빡빡장 한 통과 식당 주인에게 선물할 시집을 챙겼습니다.
빡빡장 조리법입니다.
1. 멸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 정도 돌려서 밖에 5분 정도 두었다가 바삭바삭해지면 멸치를 칼로 잘게 썬다.
2. 준비한 멸치로 육수를 만든다.
3. 양파, 대파, 표고버섯, 매운 고추 배를 갈라 씨를 빼고 쫑쫑 썰어 된장 두 큰 술과 잘게 빻은 땅콩과 아몬드와 육수를 조금 넣고, 참기름과 함께 양념에 간이 베이도록 약한 불에 볶는다.
4. 된장 4, 고추장 1, 물엿 두 큰 술을 넣고 짭짤하게 간을 맞춘다.
5. 중간 불에 끓인다.
우성옥에 20분 전에 도착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밖에서 묵주기도 5단을 바칩니다. 아버지 신부님이 들어오십니다. 아버지 신부님을 뒤에서 살짝 안아 봅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다정한 대화가 오갑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저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사제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상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깊은 경륜과 노사제의 거룩한 향기입니다.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갑니다.
“추운 겨울을 속초에서 나야 하니, 내가 선물 받고 입지 않은 겨울 옷 몇 벌 챙겨왔어.”
선물가방을 전해주시는 아버지 신부님을 제가 두 팔을 벌려 안아드립니다. 아버지의 배려와 사랑이 저를 위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심을 느낍니다. 아버지의 심장과 아들의 심장이 무언의 대화를 합니다.
“아들아, 지금까지 여러 어려움 중에도 사제의 길을 향기롭게 열심히 잘 걸어왔다. 남은 길도 힘내서 열심히 걸어가야지.”
“예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충만해져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보광사로 돌아와 선물 보따리를 풀었습니다. 카디건, 바람막이 방한복, 겨울파카입니다. 옷을 크게 입는 저에게 딱 맞은 옷입니다. 겨울 파카를 입고 사진을 찍어 전송했습니다.
“아버지 사진 보셨죠.”
“응, 잘 맞더구나.”
“입을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아버지 사랑의 냄새 맡으며 잘 입을게요.”
글:최종수(신부/ 보광사 체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