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위원 김호의 세상비평 ✍✍✍
속초시민에게 설악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눈을 뜨면 설악산을 봤고, 마을 뒷동산처럼 늘 곁에 있었고, 유년의 숨결과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끼는 추억이 깃든 곳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경관 자연유산이었고, 한때는 80~90년대엔 속초 산업의 핵심축으로, 지역 경제를 이끌던 심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설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멀어지며 긴 쇠락의 골짜기에 머물러 있다.
속초시는 최근 설악산 소공원 진입도로를 확장하고, 신규 탐방로를 조성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1.6km의 진입도로 폭을 8m에서 12m로 넓히고, 단풍철 교통체증을 해소해 관광 활성화를 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업이 과연 설악동의 진짜 회복을 이끌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설악동의 침체는 단지 길이 좁아서가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형 관광버스와 단체여행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개인이 자신의 속도와 취향으로 여행하는 시대다. 그러나, 설악동은 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낡은 숙박업소, 뻔한 식당, 즐길 거리 없는 거리. 관광객은 설악산만 보고 곧장 떠난다. 교통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길을 넓히면 차는 잘 달릴 것이다. 하지만, 목적지가 매력 없다면 더 빠르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수백억 원을 들여 만든 길이 설악동을 ‘도착지’가 아닌 ‘통과지’로 만들 가능성은 없을까.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며 추진하는 대책이, 오히려 지역을 비워버리는 결과가 되지는 않을까. 가까이 인제 원통을 봐도 더 빨리 가려는 우회도로가 결국 그 지역을 공동화, 섬처럼 만들었다. 설악동 도로 확장도, 결국 상가를 섬처럼 고립시켜 상권을 더 침체시킬 것이 자명해 보인다.
이쯤에서 ‘청산도의 느림’이 던지는 힌트를 되새겨볼 만하다.
작은 섬 청산도는 ‘느림의 길’을 컨셉으로 오히려 자동차를 제한하고, 도보 여행을 장려했다. 주민과 예술가들이 함께 만든 걷는 길, 돌담길, 갯벌 체험, 작은 찻집과 공방들이 섬을 다시 찾는 발길을 만들었다. 느림은 불편함이 아니라 매력이며, 사색과 휴식을 제공했고, 머무는 이유가 되었다.
설악동도 다르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넓은 길이 아니라 머무는 길이다. 오히려 소공원 주차장을 폐쇄하고, 외곽 B·C지구에 관광객을 유도한 뒤 설악산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가게 해보자. 3km의 그 길을 따라 지역 특산품 가게, 예술가 공방, 작은 전시관 하나씩을 놓는다면, 그 자체가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설악산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빠름’보다 ‘머무는 감동’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동이 이어질 때, 설악동의 식당도, 여관도, 마을도 다시 살아난다.
물론 교통난 해소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지역 재생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익숙한 토목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이다. 사람의 속도로, 기억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살리는 느린 길. 그 길 위에서 설악동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설악동을 살리는 길은, 반드시 아스팔트 위에 있지는 않다.
(편집위원 김호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