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은 한 번 뿐입니다. 신학교 4학년 때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갔습니다. 수, 목, 금 2박 3일 여정이었습니다. 수학여행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과 추억을 선택할 것인가,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친구 간병이라는 우정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토요일 일요일에 간병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인 형은 백혈병이 재발한 상태라 위독한 상황이었습니다. 추억보다는 우정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4살이 많았던 형은 신학교 3학년 때 만났습니다. 한 학년 윗반이었던 형은 신학교 2학년을 마치고 백혈병 앓게 되었습니다. 1년 투병생활을 마치고 3학년에 복학을 했습니다. 일명 쪽방에서 만났습니다. 각각 출입문은 따로 있고 방과 방 사이 경계는 옷장을 중앙에 놓아 벽을 만듭니다. 방 하나를 두 쪽으로 나누어서 쓴다고 해서 쪽방입니다.
혈액암이라고 할 수 있는 백혈병을 앓고 난 형은 학교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침기도와 미사를 마치고 아침을 먹습니다. 쪽방 바닥 마루를 쓸고 티걸레로 닦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내방과 형방을 쓸고 티걸레로 닦았습니다. 그렇게 깊어진 우정은 서로에게 영적인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누군가의 봉사를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몸이 불편해서 봉사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깊은 사랑과 끈끈한 영적인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그런 형이 4학년 여름방학 때 백혈병이 재발되고 말았습니다. 전남대 병원에 입원을 해서 항암을 시작했습니다. 수요일과 주일 외출 시간이면 어김없이 병원에 가서 병수발을 했습니다. 골수이식을 받기 위해 국내 최고 백혈병원인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고속버스로 서울로 가서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타고 병원에 갑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주일 오후까지 병간호를 하고 밤 11시 가까이 광주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형은 골수이식수술을 받기 위해 척추를 송곳으로 뚫어 검사를 받았습니다. 골수이식이라는 큰 수술을 앞두고 수학여행을 가야 했습니다. 제가 수학여행을 가도 마음은 병원에 있을 것이기에 수학여행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추억보다 우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정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신 학장 신부님의 배려는 평생을 두고 감사할 일입니다. 투병 중인 신학생 병간호를 위해 수학여행을 포기한 저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바로 방영구 학장 신부님이셨습니다. 모든 신학생들에게 인자한 아버지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최종수 신학생이 쉽지 않는 결정을 했네. 수학여행을 포기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텐데, 학장인 나로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 깊은 감사를 전하네. 우정은 어려울 때 드러나는 것이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지. 고맙네. 병간호 잘 하고 오게나. 다녀와서 나에게도 상황을 전해주게나.”
형의 병원비를 모금하기 위해 생활성가가수 김정식 형제님 공연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백혈병 중에도 아름다운 투병생활을 보여주고 하느님 곁으로 갔습니다. 형이 얼마나 하느님께 의탁했는지, 골수채취를 위해 척추를 송곳으로 뚫고 모래주머니를 척추에 대고 누워서 동료신학생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당신께 의탁하나이다.”라는 책을 머리맡에 두고 한 페이지씩 읽고 묵상했습니다. 얼마나 하느님께 의탁했는지를 한 통의 마지막 편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에 깊이 새겨진, 영혼의 울림이었습니다.
형은 하늘로 갔지만 형으로 인해 새로운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방영구 학장신부님과 맺어진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학장 신부님께 병원에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러 갈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이 무언지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이후 학장 신부님은 저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셨습니다. 종종 안부 전화를 드렸습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캐나다 교포사목을 마치고 공동체 연수를 떠났습니다. 캐나다 마돈나 하우스에서 2개월 동안 생활했습니다. 남미 페루에서 원주민 사목을 하고 있는 선배님 선교본당에서 사순시기와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방영구 신부님께서 사목하고 계시는 동명동 성당이었습니다. 목욕탕에서 아버지와 아들처럼 서로 등을 밀어주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만취가 되었습니다. 숙소에 돌아와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신부님은 곁에서 제 등을 두드려주시며 토하는 것을 도와주셨습니다. 너무도 많이 토해서 변기가 막혀버렸습니다. 여기서 감동의 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티셔츠를 벗고서 메리야스 바람으로 팔을 넣어서 막힌 곳을 뚫은 것이었습니다. 한 번 뚫고 물을 내리고 두 번째서야 막힌 변기가 뚫렸던 것입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토하고 나니 오히려 속이 편안해 졌습니다. 샤워를 하고 한 방에서 아버지 신부님이 깔아준 이불에서 꿀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여름휴가 때도 신부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금경축 축시도 써서 낭송을 했습니다. 찜질방에서 땀을 빼고 밖에서 바람을 쐬고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늦은 밤까지 아버지 신부님의 경륜을 가슴 깊이 새기는 휴가를 보냈습니다. 신부님 본당 미사를 대신 드려드리기도 하며 부자지간의 정을 아낌없이 나누고 받았습니다.
장례미사 때 죽림동성당을 가고 한 번도 참배를 못했습니다. 속초에 와서 제일 먼저 찾아뵈어야 할 곳이 방영구 신부님 묘지였습니다. 방영구 신부님께서 아들처럼 생각했던 형제님과 신부가 함께 춘천 죽림동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형님 스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화분 하나 바치라고 금일봉 보냈다는 전화였습니다. 깊은 배려와 사랑에 가슴 따뜻한 감동이 차올랐습니다.
묘지 앞 제대에서 방영구 신부님을 기억하며 미사를 드렸습니다.
“많이 뵙고 싶은 아버지, 아들 형제님과 아들 신부가 왔습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제 마음 속에 영원한 아버지로 계시기에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행복했습니다. 이 지상의 삶을 하느님 보시기에, 아버지 보시기에 잘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아버지이셨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아버지 묘지 앞에서 헌정가를 불렀습니다.
사랑 하나이다
사랑 하ㅡ나이다 나를 바치나이다
임께 드릴 것은 사랑하는 영혼인이다
나를 바치고 바쳐서 피는 사랑인이다
바야흐로 하늘땅 사람 모두 행복하나니
사랑 하ㅡ나이다 나를 바치나이다
나를 바친 영원 한사랑
임께 드릴 것은 사랑하는 영혼인이다
임께 드릴 것은 사랑하는 영혼인이다
춘천 닭갈비집에서 점심을 먹고 화원을 들렸습니다. 한 화분에 삼색 국화가 심어진 화분을 샀습니다. 화장실에 들러서 호수로 화분에 물을 흠뻑 주고 묘지 옆에 놓아드렸습니다. 묘지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사랑하나이다 헌정가를 부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방영구 아버지 신부님처럼 영원한 사랑을 사람들 가슴과 영혼에 심어주고 지상의 삶을 갈무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두 손 모읍니다. 방영구 신부님과의 인연을 깊게 맺어준 최유웅 형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마지막 편지
―찬미예수, 마리아
하얀 천장 네 개의 벽
딱딱한 철제침대에 누워 있지만
마음은 참 평안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이
신앙인(信仰人)의 자세가 아닐런지요.
여러 경로를 통해 형제님들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눈물겹도록 감사하는 마음의 사랑을 느낍니다.
매순간,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당신 이외는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온전히 투신하겠습니다.
하느님께 생떼 부리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행해질 수 있도록
형제님들을 위해서도 늘 기도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난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우리답게 지켜주는 것은
오직 예수뿐.
*1992년 11월 30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2차 백혈병 항암치료 중 주님의 품으로 간 광주교구 신학생이, 척추뼈를 뚫어 골수를 채취한 뒤 지혈이 되지 않아, 모래주머니를 등에 대고 누워서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무척 사랑했던 최유웅 형입니다.
글:최종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