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여 명의 이름을 하나의 ‘이름꽃’으로 피워내다
설악의 독립운동가 350여 명의 이름이 한 폭의 거대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화가 박석신이 설악권(속초 고성 양양 인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그림꽃으로 그려 연결한 4m 길이의 대작을 보광사 지장전에 설치했다. 오는 9월 12일 공식 개막을 앞두고 있지만, 작품은 이미 지장전에서 시민과 참배객들을 맞고 있다.이름을 연결한 그림꽃 두점과 소나무 두점 총 4점이 걸렸다.
작품 앞에 서면 먼저 수백 개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면 저마다 다른 표정과 필치로 그려진 이름꽃 하나하나가 보이고, 조금 물러서면 그것들이 모여 거대한 하나의 이름패이자 깃발을 이룬다.
개별적으로는 한 사람의 이름을 담은 작은 작품이지만, 전체를 바라보면 설악의 역사와 정신을 한 화면에 담아낸 거대한 역사화가 된다.
박석신 화가는 설악권을 지켜온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여러 날에 걸쳐 한 사람씩 그렸다. 이름을 쓰는 작업이 아니라 이름을 ‘호명하는’ 작업이었다.
박 화가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하나씩 그리면서 마음으로 호명하고, 영혼으로 이름을 부르는 작업을 했다”며 “이상하게도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돼 기뻤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름 사이사이에는 보광사의 일주문과 소나무, 풍경 등이 삽화처럼 배치돼 작품을 보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두 개의 대형 걸개그림 뒤로는 푸른 소나무가 배경을 이루며 화면 전체에 깊이와 울림을 더한다.
마치 광야의 소나무 숲에서 선열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일송정 푸른 솔’로 상징되는 독립운동의 노랫말이 화면 속에서 은은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는 독립운동가들뿐 아니라 6·25전쟁 당시 속초를 지키다 산화한 5용사의 이름과 보광사 관음바위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최홍희 장군의 이름도 함께 담겼다. 한 시대의 독립운동을 넘어 나라와 지역을 위해 자신을 바친 인물들을 함께 기억하고 기리는 공간으로 의미를 넓힌 것이다.
박석신 화가는 그동안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그림꽃’으로 형상화해 왔지만, 설악권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그림꽃으로 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때문에 이번 작품은 그의 회화 작업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으로 평가할 만하다. 인물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속에 묻힌 이름들을 예술의 언어로 소환하고 기억하는 작업으로 작업의 지평을 넓혔기 때문이다.
특히 수백 명의 이름을 한 화면에 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판 ‘괘불’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전통적인 괘불이 많은 사람 앞에 내걸려 공동체의 신앙과 염원을 모았다면, 박석신의 ‘이름꽃’은 수백 선열의 이름을 한데 모아 오늘의 공간에서 그들의 정신을 다시 호명한다.
400년 고찰 보광사 지장전의 공간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보광사는 그동안 이름 없이 산화하고 역사의 갈피에 묻힌 설악권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구국의승과 보광사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을 찾아 추모하고 선양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번 작품은 그 첫 번째 예술적 헌정 작업인 셈이다.
그동안 설악권에서 항일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방식은 주로 기념식과 추모행사 등 의례적 형식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보광사 지장전에서는 선열들의 이름을 예술작품으로 마주하고, 그 이름을 직접 읽고 호명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회주 석문 스님은 “이제야 선열들의 이름을 예술적 차원에서 한 번 더 호명하게 돼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진 듯하다”며 “염불하듯 선열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만나는 공간으로서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힘은 거창한 기념비가 아니라 ‘이름’에 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한 줄로 지나쳤던 이름, 오랫동안 불리지 않았던 이름, 누군가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졌던 이름들이 이제 그림꽃으로 피어났다.
한 사람의 이름이 하나의 꽃이 되고, 그 꽃들이 모여 거대한 숲을 이룬다. 그리고 그 숲의 뒤편에는 소나무가 서 있다.
그림꽃으로 피어난 350여 명의 이름. 그것은 과거를 장식하는 작품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하나의 의식에 가깝다.
보광사 지장전에서 열리는 박석신 화가의 설악권 독립운동가 이름꽃 작품 공식 개막식은 오는 9월 12일 열린다. 다만 작품은 개막식 이전에도 지장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름을 잊지 않는 것,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것.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는 시구가 연상되는 순간이다.
박석신의 그림꽃은 설악의 독립운동가들을 역사 속 인물에서 오늘의 기억으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신창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