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 100년 배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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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익을 듯 무더위가 광적이다.태양이 절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배나무는 의젓하다.100년 경륜 답다.키는 크지 않지만 품어내는 아우라는 광채가 난다.스님은 올해 배가 많이 달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잎새 속속들이 주먹만한 배들이 들어 차 있다.마치 다산의 여왕처럼 주렁주렁 달린 배들의 몸체가 더위에 상큼함을 준다.아직도 시퍼런 놈을 한입 넣고 싶다. 절집 마당에 홀로 서 있는 배나무는 개산 400주년 보광사를 자축하는 모양새다.

이 고령의 배나무가 품고 있는 배는 서양종인 듯 싶다. 양양 낙산사의 얼굴만한 배 모양이 아니라 꼭지가 수류탄처럼 생긴 모습이다.우리가 흔히 돌배라고 말하는 그런 모양 말이다.

‘미각의 번역’이라는 책을 낸 독일작가 도리스 되리는 ‘배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처음 며칠동안 딱딱하고 무뚝뚝하게 있다가 교활하게도 하룻밤새 물렁해져 우리에게 쓰디 쓴 실망을 준다“고 했다.배 종류가 무려 5천여종이 된다고 한다.조롱박처럼 생긴 서양배 이름은 ‘아바테 페텔’이라고 한다. 볼링핀처럼 몸체가 불룩한 것도 있고…

배 하면 내게 인상깊은 건 배술이다. 우리도 배술을 담그지만 스위스산 배술은 그 명성을 알아준다.특히 윌리암스 라는 상표는 최고급 배술로 호사가들을 설레게 한다. 깨끗한 45도짜리 배술은 목젖을 뜨겁게하면서 부드럽게 해주는 매혹이 있다.특파원 시절 스위스 공항에서 윌리암스라는 배술 한병을 사들고 출장길을 마무리 하던 기억이 새롭다.베를린 카페에 가서 윌리암스 잔술을 시키면 바텐더가 다시 한번 쳐다볼 정도로 고급 술에 속한다.오래전 연세대 최정호 교수가 베를린에 출장 오면 카페에서 이 술을 시켜 놓고 여독을 달래곤 했었다.

또 다른 풍경도 있다.어릴 적 신평리 교회 가던 길 담장에 키가 큰 배나무가 있었다.작대기를 이용해서 배를 땄던거 같다. 그래서인지 보광사 배나무는 키가 작아 친근하고  서서 만져볼 수 있어 더 친밀감이 든다. 마치 아이 볼을 만지듯 말이다.올해는 배를 봉지에 싸지 않아서 더 좋다.

냉면 고명으로 올라가는 큼직한 배의 시원한 조각이나 고기를 잴 때 쓰는 배와는 다른 종류이고 그렇게 팔려 나갈 상품도 아니다.스님에게 물었더니 ’ 절집 배는 다 새들 차지‘다고 말씀하신다.관상용으로 눈으로 즐기면 되고 새들이 입이 즐거우면 그것도 공평한 일이리라.

100년 동안 한자리에 서 있는 배나무는 보광사의 터줏대감이다. 400주년 맞는 보광사의 지분이 있는 성스러운 나무다.날도 더운데 배나무를 보면서 잡생각을 섞으니 더위가 좀 가시는 듯하다.그리고 내가 말을 거니  ‘무뚝뚝한’ 배도 친구가 되었다. 그나 저나 새들이 익기도 전에 다 쪼아 먹어 배들이 일찍 떠나면 좀 외로울 것 같다.

신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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