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에게 속초는 풍경이 아니다. 캔버스의 고향이다.
40여 년 화업을 이어온 중견화가에게 속초는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붓을 들게 하는 곳이며, 설악과 동해를 통해 자신의 회화적 언어를 가장 선명하게 펼쳐 보이는 창작의 터전이다.
그가 속초에 별도의 화실을 마련한 것은 수년 전이다. 그러나 속초와의 인연은 훨씬 오래됐다. 30여 년 전 청호동을 찾아 스케치하던 날, 그가 마주한 속초의 풍경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직하고 쓸쓸했다. 그 쓸쓸함 속에 바다와 사람의 시간이 있었고, 그는 그 풍경을 잊지 못했다.
그때의 인상이 지금의 김정호를 속초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속초에 오면 설악과 바다를 그린다. 다른 것을 찾지 않는다. 갯배가 오가는 청호동의 바다, 조도와 등대, 달마봉과 장수대, 그리고 울산바위. 익숙한 풍경들이지만 그의 캔버스에서는 전혀 다른 표정을 얻는다.
김정호의 그림에는 단순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오랜 화업을 거쳐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공있는 단순함이다.
그는 현장에서 바로 그린다. 현장에서 받은 감흥을 그대로 붓에 싣는다. 다시 찾아와 고치거나 덧칠하는 경우가 드물다. 눈앞의 풍경을 세밀하게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에게 들어온 풍경의 본질을 붙잡는다.
그래서 그의 붓질은 빠르고 강하다.
응축된 붓필이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관찰과 경험, 색에 대한 감각, 풍경을 읽는 눈이 한 번의 붓질 속에 압축된다. 젊은 화가의 붓질이 발견이라면, 김정호의 붓질은 축적이다. 많이 그려본 사람이기에 과감하게 생략하고, 오래 바라본 사람이기에 단번에 핵심을 짚어낸다.
그의 그림에서 장대함과 단순함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간다. 거대한 설악을 몇 개의 강한 선과 덩어리로 세우고, 넓은 동해를 절제된 색과 붓질로 담아낸다. 크게 그리되 복잡하게 그리지 않는 것. 이것이 김정호 회화의 힘이다.
특히 울산바위에 이르면 그의 회화세계가 더욱 선명해진다.
울산바위는 수많은 화가가 그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본 산이다. 하지만 김정호에게 울산바위는 단순한 풍경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바위의 표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기운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울산바위에는 묘한 중량감이 있다. 거대한 암벽의 형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바위의 기세, 설악이 품고 있는 정적, 그곳을 바라보는 인간의 경외감까지 화면에 스며든다.
특히 황철봉을 올라 울산바위를 후면에서 바라본 시선은 그에게 또 다른 울산바위를 열어준다. 우리가 흔히 보아온 관광지의 울산바위가 아니라, 산을 오르고 능선을 넘어서야 만날 수 있는 울산바위다. 그 순간 풍경은 대상에서 해석으로 넘어간다.
울산바위의 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바위를 똑같이 그리는 일이 아니라 바위가 품고 있는 기운을 자신의 붓으로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김정호는 그 작업을 통해 울산바위를 하나의 거대한 자연물에서 하나의 정신적 풍경으로 바꾸어 놓는다.그러기에 김정호의 울산바위는 사유의 대상으로 철학적 시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의 회화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케렌시아(Querencia)다.
케렌시아는 투우사가 소의 공격을 피해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의 기운을 회복하는 장소를 뜻한다. 현대적으로는 자신만의 안식처, 에너지를 충전하는 장소라는 의미로 쓰인다.
김정호에게 속초의 화실이 그렇다.
도시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속초에 내려오면 그는 산과 바다 앞에서 다시 힘을 얻는다. 화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동해와 갯배 풍경을 바라보며 붓을 든다. 속초는 그에게 풍경을 제공하는 장소인 동시에 자신을 회복시키는 장소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이상하리만큼 생명력이 있다.
바다는 정지된 바다가 아니다.
활어처럼 살아 있다.
푸른 바다 위에 내려앉은 가을빛, 항구를 오가는 갯배, 설악의 능선과 울산바위의 암벽이 그의 붓끝을 지나면서 꿈틀거린다. 풍경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 숨어 있던 생명력을 끌어낸 듯하다.
색채 역시 통이 크다. 미시령의 가을을 붉게 밀어붙이고, 바다의 푸름을 깊게 끌어낸다. 필요한 색이라면 아낌없이 질러버린다. 유화의 물성을 숨기지 않는다. 두터운 물감과 강한 붓질이 만나 화면에는 질감과 깊이가 생긴다.
하지만 화려한 색채의 이면에는 오히려 절제가 있다.
그는 많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덜어내고, 또 덜어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몇 개의 붓질로 풍경 전체를 말한다.
그것이 40여 년 화업이 만들어낸 내공이다. 무엇을 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아는 것.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김정호가 말하는 ‘개념주의’의 본질도 여기에 닿아 있다.
그래서 그의 울산바위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한 화가가 오랜 시간 설악을 바라본 결과물이며, 속초라는 장소와 교감하면서 만들어낸 자신의 내면 풍경이다.
속초는 그의 캔버스의 고향이고, 울산바위는 그 고향에서 만난 가장 깊은 대상이다.
그는 속초의 바다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그리고, 설악에서 시간의 무게를 그린다. 그리고 울산바위에서 자연이 품은 혼을 끌어낸다.
단순하지만 얕지 않고, 거칠지만 무겁지 않으며, 장대하지만 과장하지 않는다.
김정호의 붓은 그렇게 많은 것을 덜어내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의 캔버스에 속초가 있고, 그 속초의 한가운데 설악이 있으며, 설악의 중심에 울산바위가 있다.
그리고 그 울산바위 위로, 40여 년 화업의 내공과 한 화가의 시간이 응축된 붓질이 흐른다.
신창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