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이 현저하게 불편하신 어르신의 요청으로 방문진료에 나섰다.체온을 재고 호흡음을 듣는 사이, 어르신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소장! 여기 좀 봐줘” 이내 엉덩이를 보여주셨고, 이미 진행된 욕창이였다.
요양등급이 있어 요양보호사가 다녀가는 댁이셨고 복지서비스가 다양하게 관리되고 있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르신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대소변관리도 안되는 분도 아니니 의료진이 아니면 보여지는게 자존심이셨나 싶었다.
돌봄은 매뉴얼보다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것.보건진료소는 그런 관계가 살아 있는 현장이다. 진료소를 찾는 주민들은 단지 혈압을 재거나 약을 받기 위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택배 좀 받아주세요.” “핸드폰이 안 돼요.” “통장 내역 좀 봐줘요.” 심지어 우편물을 읽어달라는 부탁도 많다. 가족에게도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청 속에는 단순한 서비스 수요가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의 호소가 숨어 있다. 관계가 있어야 욕구가 드러나고, 연계도 가능하다. 돌봄은 제도가 아닌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것이다.현장은 제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섬세하다.
당뇨 합병증으로 다리를 절단한 이가 경제적이유로 병원에서 강제퇴원하여 노모가 사시는 곳에 오게 되면서 1년간 129회 방문해 돌본 동료의 사례는 그 단적인 예다. 복지 연계, 관내이주 조치, 재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할 수 밖에 없음에도 지역에서 지속관리 해야 함은 월1,2회 방문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돌봄은 단발성 대응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성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돌봄은 ‘지역의 얼굴’을 닮아야 한다.
문제는, 모든 지역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마을은 오밀조밀 모여 이웃 간 왕래가 잦고, 어떤 곳은 집과 집 사이가 몇 백 미터 떨어져 얼굴 보기조차 어렵다. 환경이 다르고, 구성원이 다르고, 관계의 밀도도 다르다. 그런데도 하나의 기준만 적용해 돌봄 체계를 설계한다면, 필연적으로 놓치는 사람이 생긴다.
이 지점에서 감히 말하고 싶다.보건진료소는 지역의 얼굴을 가장 잘 아는 곳이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 변화, 예전보다 느려진 걸음걸이, 평소보다 쓸쓸해 보이는 눈빛—이러한 미세한 징후를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이 보건진료소다. 관계의 끈으로 사람을 붙잡고, 시스템보다 먼저 반응하는 ‘돌봄의 감각기관’이자 ‘작은 기지’인 셈이다.
기술은 발전한다. 원격진료, 디지털 헬스케어, 건강 데이터…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그 어떤 기술도 외로움을 대신 안아줄 수는 없다. 의학신문 칼럼에서 본 문장이 떠오른다.
“기술은 발전하는데, 정작 환자 곁에는 누가 남아 있는가.”
한 어르신이 쓰러지셨는데 주변분의 말씀으로 협심증임을 직시할 수 있는 증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즉시 이웃분이 복용중인 약물이 떠올라 가져오게 하여 다행히도 이미 닫혀버린 입은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음에도 치아틈 사이로 넣었고 119가 오기전까지 회복되어 후동되었다. 그건 시스템이 아닌, 이웃의 관계망이 만든 생명의 연결이었다.
요즘은 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을 하시는 분들도 늘고 있다. 말기암, 노환 등 마지막을 준비하는 분들과 함께하며 “더 해드릴 수 있는 게 있었을까” 되묻게 된다. 떠나신 분의 가족이 진료소를 다시 찾아와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 한마디가 우리를 버티게 한다.그것이 바로 데이터가 아닌 ‘관계의 힘’이다.
2024년 3월 돌봄통합지원법은 이미 만들어졌다. 그 통합이 시스템에서 유기적으로 잘 연계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장은 녹록치 않다.
또한 지역적, 구조적인 통합을 기반으로 설계한다면 기능적인 역할범위가 더 섬세해져야 한다. 획일적인 기준으로의 통합방식은 오히려 관계를 단절시키고, 현장을 더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특히 보건진료소의 현실적 필요성과 관계 기반의 특수성 위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돌봄은 산업이 아닌 삶이다.기술이 아닌 온기이고, 관계의 기억이다.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주민의 얼굴이다.
글:김영남 회장(전국보건진료소장회/ 강원 고성군 아야진 보건진료소장)
편집자주: 이 글은 2025년 5월1일 민주당보건의료위원회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지역보건의료기관의 역할과 주민참여’ 토론회에서 지정토론자 김영남회장의 기조발언을 정리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