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국이 울산바위 연작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했다. 이번에는 익숙한 정면이 아니다. 울산바위의 후면이다. 황철봉을 등정해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서 바라본 울산바위의 새로운 얼굴이다.
울산바위를 앞에 두고 바다를 품었다. 거대한 암봉 너머로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그 위로 짙고 푸른 하늘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산과 바다, 하늘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진다. 단순한 구도인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문다. 오히려 덜어냈기 때문에 더 장쾌하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파란색이다.
화가는 이 색을 두고 “겨울의 파란 하늘일 수도 있고, 동해바다일 수도 있고, 밤하늘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 파랑이다. 그래서 화면의 하늘은 하늘이면서 바다이고, 바다는 다시 하늘처럼 열린다. 여기에 작은 초승달 하나가 떠 있다. 거대한 울산바위와 망망한 세계 사이에 놓인 작은 달은 인간의 존재를 문득 돌아보게 한다.
후면에서 본 울산바위의 형상은 정면이나 측면에서 보았을 때와 사뭇 다르다. 그러나 어느 방향에서 보든 울산바위는 거대한 모노리스 같은 풍체를 잃지 않는다. 수많은 암봉이 하나의 거대한 존재로 솟아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박동국은 바로 그 울산바위를 다시 생각한다.
익숙한 대상을 익숙한 방식으로 그리는 데 머물지 않고,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고 다른 색으로 해석한다. 울산바위라는 거대한 자연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울산바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업에 가깝다.
그의 붓질도 이전보다 한층 강해졌다. 바위의 흰색과 검은 선묘가 맞부딪히면서 암봉의 골격을 거칠고 힘 있게 드러낸다. 여기에 하늘과 바다를 압도하는 푸른색을 하나의 색면처럼 밀어붙였다. 복잡한 것을 덜어내고 색과 형태를 분명하게 세운 것이다. 단순하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다. 오히려 단순성 속에서 울산바위의 존재감은 더욱 커진다.
익숙한 것과 작별하려면 과거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린다는 것은 완전한 폐기가 아니다. 그동안 쌓아온 토대 위에 다시 새로운 것을 건축하는 일이다. 박동국의 울산바위가 그렇다.
그는 같은 울산바위를 반복해서 그리면서 오히려 울산바위에서 멀어지고 있다. 정면에서 벗어나고,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고, 익숙한 색에서도 벗어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울산바위의 또 다른 세계를 찾아낸다.
이번 작품은 그래서 연작의 마지막이라기보다 새로운 울산바위의 시작처럼 보인다.
울산바위의 기운이 바다를 품고 멀리 뻗어나간다. 산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하늘이 되고, 하늘은 다시 하나의 거대한 공간이 된다. 산과 바다와 하늘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만나면서 울산바위는 더 이상 한 지역의 명산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행성처럼 확장된다.
폭염이 한풀 꺾이는 이때, 박동국이 내놓은 파란 하늘의 울산바위는 그래서 더욱 새롭다. 푸른색 하나가 화면을 열어젖히고, 흰 암봉들은 그 열린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초승달.
거대한 암봉 앞에서 보면 너무나 작고, 그에 비하면 인간은 더 작다. 그 순간 우리는 자연의 거대한 존재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울산바위는 그래서 작가에게도, 우리에게도 여전히 부동의 스승이다. 끊임없이 바라보게 하고, 다시 그리게 하고,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게 한다. 수년천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바위가 캔버스에서는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까닭이다.
박동국은 이번에 고단한 등정을 통해 얻은 울산바위의 뒤편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울산바위가 아니다. 뒤를 돌아 바다를 품은 울산바위다.
펑 뚫린 듯 장쾌하다.
좋다.
신창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