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식 교수의 조각시 산책 2)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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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지렁이야
햇빛이 쨍쨍한 날
길바닥에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ㅡ 제발 / 이상국

Why emerge on such a scorching day?
Please,
Stay hidden and avoid the rough way.
ㅡ Oh, worm / Lee Sang-guk

♧ 원래 ‘디룡(地龍)이’로 고문헌에 나옵니다. 감히 용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한 명명 아닌가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 속담이 있지요. 낚싯바늘 끝에서도 그랬습니다. 약하디약한 존재의 최대한의 저항이 슬픕니다. 실제로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최하위 가축이요 이로운 동물입니다.

지렁이는 흙 속에 있는 공기를 피부로 흡수하여 호흡을 합니다. 우기에 자주 보는 건 토양이 흠뻑 젖어 지하수위가 올라가면 피부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쨍하고 일기가 맑아지면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말라 죽지요. 땅을 울려 위협해도 나옵니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죠. 어떤 새들은 이 점을 역이용하여 먹이로 삼습니다.

삶의 터전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벗어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모험도 호기심도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하는 수 없이! 그러다가 하필, 더 참혹한 비극을 맞기도 합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오, 신이여, 제발.

※ 조각시는 여덟 말마디 내외의 짧은 자유시임.

♧ 조각시 영문 번역을 함께 수록합니다. 일반시도 한국 정서를 담아내기 어려운데 고도로 함축된 조각시를 번역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K-문화의 세계 공유를 위해, 다문화 환경을 고려하여 최병선 영문학자(문학박사, 전 경동대학교 교수)께 재능기부 부탁을 드려 함께 합니다. 제게 보낸 메시지를 보면 그 고충을 읽을 수 있으며, 노고에 깊이 감사합니다.

“내팽개쳐진 느낌의 ‘길바닥’, ‘나옴’, ‘쨍쨍한 날’ 등 시어에 함의된 의미를 영어로 표현하는데 한계를 절감하나 최대한 표현되도록 고심했습니다. 여기에 운율도 숙제입니다. 그리하여 Why ~ Day 리듬에, Stay ~ way로 호응하는 운율의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pavement(아스팔트 도로), path(한적한 산속 길)를 인생 여정의 의미도 지닌 way로 대체하여 번역한 이유입니다.”

해설 이하(李夏) / 번역 최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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