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가을까지
내 안을 휘젓더니
이 가슴 할퀴어 놓고
졸향가(卒香歌)를 부른다
ㅡ 저 작은 분홍 찔레 / 채현병
From spring to autumn,
You stirred my soul,
Scratched this heart of mine,
And now you sing
a farewell song of scent.
ㅡThat Small Pink Briar Rose
by Chae Hyunbyung
♧ 찔레는 솔직하다. 아예 이름부터 찌른다, 찔린다고 밝혔다. 화창한 봄날에 그것도 무더기로 피건만 꽃송이 하나하나를 보면 왠지 애틋하다. 분홍찔레는 꽃잎의 반이 발그스레 홍조를 띤다. 화장을 처음 해본 새내기의 핑크메이크업이랄까?
찔레는 장미와 같은 종족이며 때로는 장미 품종 개발에 모태 역활을 하건만 둘은 다르다. 시대 이미지로 환치하면 찔레는 선진국 대열에 선 21세기의 대한민국의 꽃이 아니라, 한번 잘살아 보자고 발버둥 치던 20세기의 꽃이다. 그래서인지 때로 한아름 안기는 향기가 도리어 서글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좀 살아보겠다고 도회로 떠나온 사람의 향수 어린 정서가 남아서다. 심지어 이역만리로 떠나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을 부르던 사무친 심정은 오죽했으랴. 가수 백난아의 이 ‘찔레꽃’ 노래가 나온 지도 팔십 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아직도 애창되고 있음은 여전히 귀소본능이 흐르기 때문이다.
찔레는 서민이요 백성의 본새다. 온통 거짓으로 위장하고 범죄를 범하고 진영 편가르기 놀음을 하면서도 정의로운 체 코스프레 하는 정치꾼은 애당초 이 꽃의 이미저리와는 거리가 멀다. 여의도 꾼들은 차라리 가시를 감추고 유혹하는 덩굴장미에 가깝다. 찔레꽃의 마지막은 꽃비 같은 낙화이나 덩굴장미의 낙화는 초췌하고 지저분하다. 예외가 없었다.
찔레의 애잔함은 전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몽골(원) 지배를 받던 고려 때다. 병든 아버지를 위해 약초를 캐러 갔다가 공녀를 물색하던 관원에게 잡힌 찔레와 달래라는 자매가 있었다. 그나마 병든 부친에 대한 효심과 사정을 봐주어 언니인 찔레가 원나라로 가게 됐다.
불행 중 다행히도 좋은 주인을 만났지만, 향수와 가족 걱정에 자주 병이 났다. 그러자 주인은 10년이 지난 뒤 고향에 다녀오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고려의 고향집은 온데간데없었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목을 매어 죽고, 동생 달래는 정처를 알 수 없었다. 찔레는 달래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다가 어느 겨울 폭설에 외롭게 죽는다.
봄이 되자 죽은 자리와 찾아 헤매던 곳곳마다 꽃이 피어났다. 그래서 지금도 찔레꽃은 여기저기 핀단다.한 서린 마음은 가시로, 그리움은 여린 꽃으로, 애타는 운명은 빨간 열매가 되었다고 후세 사람들은 말한다. 나라와 지도자가 못나면 백성이 고난이다. 가시 돋힐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찔레는 가시를 제거한 꽃말을 남겼다. ‘사랑,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고독’이다.
시인은 인사동 어느 집 담가에 핀 찔레를 본 후 쓴 시라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라 했으니 자주 오가며 꽃은 물론이거니와 열매까지 대한 모양이다. 이 꽃나무로 인해 도심에서 향수에 젖을 수 있었고 수수한 본연을 만났으며 가물가물해진 옛사람을 떠올렸을 게다. 꽃말을 찾아보지 않아도 그런 마음이었다. 상실 시대에 상실하지 않은 아름다움, 세상의 가식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순수함, 애틋함에도 미소 짓게 하는 찔레와의 교감을 시인은 가슴 속에 담았다.
역자가 “내 안”을 “my soul(내 영혼)”로 번역함도 나만의 일방적 감흥이 아니라 찔레와의 영적 교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 “졸향가(卒香歌)”는 “Farewell song of scent(향기의 이별 노래)”로 번역함으로써 이별을 고하는 주체가 찔레임을 표현했다.
잔잔한 여운을 남긴 채 꽃과 열매가 떠나고 드러난 작은 가시 위에 몇 번의 눈이 내리고 봄비가 흐른 뒤 다시 새싹이 돋고 수줍게 분홍빛이 감돌게 되리라. 그러고는 찔레의 졸향가는 해마다 거듭되고 그렇게 그렇게 다시 거듭되고…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이 졸향가를 사랑하던 찔레에게 남기리라.
※ 海月 채현병: 시조와 비평으로 등단(2006),
(사)한국시조협회 이사장 역임, 한국문학신문 문학상 (시조부문 대상) 외 다수, 시조집『팔일간의 축제』
ㅡ 해설 이하(李夏. 이만식) / 번역 김경미(경동대학교 온사람교양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