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식 교수의 조각시 산책 11)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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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ㅡ 낙엽 / 유치환(1908-1967)​

Your memories—I am sweeping them away
like this.
ㅡ Fallen Leaves By Yoo Chi-hwan

♧ 단순한데 묘하다. 우선 청마 유치환의 유명세가 아니면 이 다섯 말마디의 짧은 시가 주목 받았을까? 이효석(1907-1942)의 유명한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를 연상하는 문장이어도 십상이다. 또 ‘너의 추억’은 너에 대한 추억이라는 건지 네가 지닌 추억이라는 건지. 굳이 ‘나는’이라는 시적 화자를 밝히지 않아도 되지 않나? 이렇게 쓸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쓸고 있다는 건가? 시는 한 문장인데 함의하는 바가 많으니, 시는 시인가 보다.
우선 짚어보자. 청마의 시가 아니었다면?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시는 아니지 않나? 누가 뭐래도 시인의 명망이라는 프리미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해설자는 이런 점이 마땅치 않다고 여겨 왔다. 그러나 엄연히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 ‘권위의 법칙, 권위의 상징’에 의한 위력은 이론으로 정립되어 있다. 작가 명성은 텍스트 가치에 큰 덤을 얹어준다.
그래도 마음먹고 쏘아붙일 말이 있다. “그 권위에 의한 작품은 서너 작품이면 족하니 남발하지 말라. 더는 사이비다.” 최근에 시 같지 않은 나긋한 글로 행갈이 하여 시입네 하며 출판 행사를 연신 여는 유명 시인이 몇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청마의 전작을 살펴보면 허투루 쓴 작품을 찾기 어렵다. 그러기에 이 ‘낙엽’ 조각시는 진성성이 있어 보이고 이리저리 생각의 여지를 준다.

낙엽은 과학으로 보면 녹색을 띠게 하는 엽록소가 찬 기후로 인해 분해되고 소멸하는 잎이다. 엽록소에 기죽어 있던 노란색의 카로티노이드, 주황색의 크산토필, 붉은색의 안토시아닌 등의 색소가 차츰 드러나면 단풍이다. 그러다가 잎자루에 떨켜층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물과 영양분의 이동을 차단한다. 잎은 가지와 연결이 끊어지게 되니 바람이나 중력으로 인해 떨어진다. 숱한 잎은 모체의 생존을 위해 모진 비바람과 해충을 견디며 광합성을 하고 수분을 끌어올려 기화시키는 증산 노동을 해왔다.

그러다가 겨울에는 불필요해지기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희생을 감행하는 것이다. 숭고하기까지 하다. 낙엽은 생물학의 범주를 벗어나 인간의 삶과 결부한 예술, 철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소재로 쓰였다.

시인은 자연과학 지식을 가지지 않아도 낙엽으로부터 순환의 섭리와 삶의 무상함과 변화, 질서와 조화 등의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얻는다. 이를 정서화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독자와 감동을 공유한다. 그렇더라도 낙엽은 사람마다 감성이 다르고 나름대로 특별하게 해석하니 그 공유는 가지각색이다. 같은 낙엽을 보거나 밟더라도 어떤 이는 덧없음을 한탄하는가 하면, 다른 이는 사랑과 이별을 떠올리거나 계절의 낭만으로 본다.

그렇다면 청마시인은 어떤 낙엽을 대하고 있을까? 앞서 문제 제기한 ‘너의 추억’이라는 낙엽이다. 생동하지 않는, 이제는 바래어 져버린 과거다. 굳이 ‘나는’ 했으니 나와 네가 얽힌 추억이다. 내가 지닌 너에 대한 시간이고 네가 지닌 나에 대한 시간이다. 번역한 김경미 교수는 고심 끝에 ‘Your memories’로 이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냈다. 이어 시인은 ‘이렇게 쓸고 있다’라고 했다. 역설적으로 쓸고 있음을 모으는 거다. 지우는 게 아니라 담는 거다.

시는 객관적인 사물을 주관적인 관찰로 뒤집음으로써 현상에 대한 묘사를 깊이 있게 하고 새로운 연상의 이미지를 생성시킨다.그러면 이 시에서 ‘너’란 누굴까? 이미지 속에 떠오르는 추억의 대상, 너는 할반지통(割半之痛)의 슬픔으로 사별한 동생과 누이일까? 이인칭 ‘너’로 보아 동격이나 아랫벌인 다른 삼자일까?그래도 누구보다 떠오르는 사람은 이 사람이어야 시맛이 제격이다. 연모의 여인이었던 정운 이영도 시조시인이다. 청마가 사고사로 세상을 뜰 때까지 보낸 오천여 통의 편지가 그녀를 향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나의 세속적 시야로는 동의할 수 없지만 세간은 플라토닉 사랑이라 했다.

낙엽은 누구나의 낙엽이다. 그러나 청마가 쓸어모으는 이 낙엽은 청마만의 추억의 낱개이자 특별한 낙엽 더미다. 현대 철학의 대가인 하이데거가 설명했다면 이를 ‘존재’라는 개념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청마의 낙엽은 ‘대체될 수 없는 너와 나만의 특별한 only one”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의 시간을 공유했으니 완전한 존재가 된다.

쓸어모은 낙엽은 어떻게 했을까? 이효석의 수필과 연결하면 그럴듯하겠지만 몹쓸 연상이다. 이 쓸쓸하고 애잔한 시의 프레임 밖에는 추억의 낙엽을 쓸어 태우는 게 아니라 고이 쓸어 쌓아두는 일이었으리라. 흩어지면 또 모으고. 날리면 다시 쓸고…. 김소월의 시 ‘못잊어’ 마지막 구절이면 호응이 맞겠다.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나요?’

ㅡ 해설 이하(李夏. 이만식) / 번역 김경미(경동대학교 온사람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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