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흑백사진에는 ‘보광사를 찾아서 4292 4.23’라고 쓰여 있다. 당시 사진에 기념날짜를 적는 게 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사진이다. 단기 4292년은 1959년이다. 아마도 사월초파일 무렵 보광사를 찾은 가족 기념사진이다.오래된 사진첩에서 이 사진을 꺼내든 심희섭씨(92세)는 그렇게 회고했다.앞에 서 있는 큰아들과 외딸이 이제 70을 바라보고 있고 남편(길태주)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무상한 세월이다.
최근들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진 심씨는 개산 400주년을 맞는 보광사의 산증인이다.강릉이 고향인 그는 평창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길태주와 결혼했다. 남편이 속초로 발령돼 따라서 와 대포동에서 살림을 차렸다가 중앙동으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낙산사도 다니고 헸지만 영랑호 보광사가 진정한 인연의 자리가 되었다.
“집앞에 길이 나기 전에는 저 뒤로 다녔지요.범바위 막국수 집도 길가에 있었고 하루에도 두서너번을 갔으니 말입니다.절집 할머니가 참 잘해주었는데…” 마침 어머니 집에 다니러 온 딸 역시 어머니와 보광사를 가던 길을 추억했다.그렇게 남편과 함께 가족의 보광사 나들이가 자연스러웠고 흑백사진들이 그 시간을 증거하고 있다.
슬라브 2층 집 마당에 놓인 수석을 보면서 “저걸 다 남편이 해 놓은 것인데 아직 그대로 있지요.” 여러개의 수석들이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혀졌다.한편 저 돌들이 평안북도 덕천이 고향인 남편 길태주의 망향을 의미하고 있었던 수석이 아닌가 여겨졌다.
교사였던 남편의 박봉으로 생활이 어렵자 심씨는 ‘속초 고무신’ 가게를 운영해서 살림을 뒷받침했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영위하면서도 보광사와 신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과거 사진에는 그런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참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는 게 확인되었다.
“혼자 전쟁통에 내려온 남편은 외로웠고 늘 고향을 그리워했지요.그러면서도 내색을 안했으니 그 속은 얼마나 탔겠어요” 이 말을 곁에서 듣던 딸은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북에 두고 온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함께 했다고 회고한다.
길태주씨는 허리가 아팠는데 치료과정에서 불운하게도 일찍 세상을 떴다.그는 그간 수집했던 다양한 물품들을 속초시립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애타는 편지도 있다. 거기에는 “억압속에 있을 북녘 가족의 모습 생각하니 잠을 못 이룬다”는 통한의 심경이 있다.올해 초 보광사 개산 400주년 지장보살전시회에 참석했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유품 전시물들을 보면서 많이 아파했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 모두 객지에 나가 있고 혼자 있는 심희섭씨 집 거실에는 남편을 그리는 사진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통일전망대서 본 북녘 사진 모습도 그 중 하나다.북에서 맨몸으로 내려온 남편 만나 속초에서 아이들 낳고 키우면서 속초에서 평생을 보낸 그에게 보광사는 정신적인 안식처였다. 남편의 49재도 보광사에서 올렸다.보광사 신도들과 함께 했던 이런 저런 행사나 발걸음이 어제 일만 같다.“ 요즘은 내가 다리가 편치 않아서 자주 못 가는데 이번 백중에는 꼭 들르겠다”고 한다.
1930년대 금강산 자락에서 현재 자리로 옮겨온 보광사는 심씨 같은 한결같은 불심이 쌓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그 점에서 개산 400주년의 의미는 특별하다.특히 정전 70주년을 맞는 올해 피난민 남편과 평생 실향의 도시에서 살아온 심희섭씨가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고 “귀가 잘 안 들린다고”하지만 눈시울이 불거지는 그의 모습에서 긴 인생여로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 했다.
신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