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기 칼럼) 타락한 공동체의 카니발과 바람 부는 흙길 그리고 구원, 두편의 영화속에 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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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타르의 《사탄탱고》(Sátántangó, 1994)는 단순히 한 폐허의 마을을 기록한 흑백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끝내 오지 않는 세상의 정밀한 지도이며, 무너진 시간 속을 걸어가는 존재론적 행진곡이다. 흑백의 거대한 롱테이크, 느리게 흘러가는 카메라의 리듬은 단순한 미학의 차원을 넘어 ‘세계의 잔존물’을 탐사하는 철학적 장치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흥미롭게도 한국문학 독자에게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을 연상시킨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와 정을 통하고, 남편이 돌아오자 그는 황급히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남쪽으로 향하겠다고 말한다. 폐허의 마을, 남쪽을 향한 도주, 그리고 관계의 붕괴.

이 세 단어는 『삼포가는 길』의 원초적 정조와 거의 동일하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노동자 영달, 정씨 그리고 백화 등 세 인물이 “삼포”를 향해 떠나는 길은 사실상 “잃어버린 공동체를 향한 회귀”의 상징이었다. 벨라 타르의 영화에서도 이 떠남은 “부패한 공동체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그 이탈조차 되돌아와야 하는 운명”의 시작이다.

이 서두 장면은 영화 전체의 구조적 은유를 제시한다. ‘남쪽’은 탈출의 방향이 아니라 순환의 한 고리이며, 인간은 결코 그 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카메라는 인간의 행위를 멀찍이 바라본다. 관조의 거리, 혹은 신의 시선처럼 느리게 미끄러지는 화면은 그들이 이미 사라진 시간 속을 반복하는 유령들임을 암시한다.

이제, 이 무한 순환의 세계에서 가장 상징적인 세 장면 ① 소녀와 고양이의 장면, ② 춤추는 마을 사람들의 장면, ③ 바람 부는 흙길을 두 남자가 걸어가는 장면 을 중심으로, 영화의 주제적 심층을 탐구한다.

① 소녀와 고양이 ― 무너진 구원과 잔혹한 순수

《사탄탱고》의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는 어린 소녀 에스테르가 고양이를 괴롭히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이다. 흑백의 긴 시퀀스는 잔혹함보다 ‘지속’ 그 자체로 관객을 괴롭힌다. 벨라 타르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죄의식의 본질을 탐구한다. 아이의 행위는 단순한 잔혹성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마지막 시도로 읽힌다.

마을의 어른들은 거짓과 탐욕에 잠식되어 있고, 아이는 오직 “고양이”라는 약한 생명에게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권력의 행사는 곧 자기혐오로 되돌아온다. 결국 소녀는 자신이 죽인 고양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배제되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통로인 “죽음”을 택한다.

이 장면은 기독교적 구원과 세속적 권력의 교차점에서 인간의 본능적 폭력을 드러낸다. 벨라 타르의 카메라는 단 한 번도 그 행위를 ‘도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잔혹성은 시간이 흐르는 방식 속에서 자연처럼 발생하는 일이다.

이때 반복되는 발자국 소리, 창문 틈의 바람, 죽은 고양이의 흔적은 무너진 신의 침묵을 상징한다. 에스테르는 작은 신이었다. 그리고 신은 이미 세상에서 추방되었다.

이 장면에 대해 일부 평론가는 “벨라 타르는 인간 내면의 도덕적 모호성을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치환한다”고 말한다. 이는 윤리적 회개가 아닌, ‘인간 존재 자체의 실패’를 보여주는 미장센이다. 소녀의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세상에서 더는 머물 수 없는 ‘시간의 추방’이다.

② 춤추는 마을 사람들 ― 타락한 공동체의 카니발

두 번째 명장면은 황폐한 마을 사람들이 술에 취해 탱고를 추는 장면이다. 마치 폐허 속의 축제처럼 보이지만, 그 춤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의 회전이다. 벨라 타르는 ‘사탄탱고’라는 제목 자체를 이 장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사탄과의 춤, 혹은 구원 없는 회전.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 거의 10분 이상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 회전한다. 음악은 리듬을 잃고, 인간의 몸짓은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며, 누군가는 술에 취해 바닥에 쓰러진다.

이 집단적 리듬은 타락의 클라이맥스이자 공동체의 최종 초상이다. ‘탱고’는 이 영화의 구조적 은유이기도 하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스텝처럼, 이들의 인생도 한 발 나아가면 두 발 물러선다.

이때 등장하는 ‘이리미아스’(Mihály Víg)는 자신을 예언자이자 지도자로 가장하지만, 실상은 허망한 언어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사기꾼이다. 그는 ‘구원’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결국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끈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따라간다. 인간은 희망이 아니라 희망의 언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즉 “벨라 타르의 인물들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구원의 흉내’를 내는 존재들”이며, 이는 바로 이 춤 장면에서 집약된다. 춤은 공동체의 해체를 넘어, 신 없는 의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에서 세 인물이 헛된 낙원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이들의 춤 역시 구원을 흉내 내는 ‘가짜 여행’이다. 그러나 벨라 타르는 그 허망함 속에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절망 속의 리듬, 그것이 인간 존재의 비극적 생명력이다.

③ 바람 부는 흙길 ― 끝없는 순환의 은유

이리미아스와 동행이 바람 부는 흙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마치 끝없는 순환의 은유처럼 보인다. 먼지가 하늘을 덮고, 마을은 이미 사라진 듯 보인다. 이 롱숏의 여백 속에서 카메라는 인간이 ‘걸어가는 존재’임을 확인시킨다. 걷는다는 것은 벨라 타르 영화에서 유일한 저항의 행위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이 ‘무한 루프 구조’는 《사탄탱고》의 서사적 핵심이다. 영화는 실제로 탱고의 스텝처럼 6:6의 대칭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영화의 후반부는 전반부를 거꾸로 반영하며, 모든 사건은 이미 이전에 반복된 것들이다.

바람이 불고, 먼지가 인물들의 얼굴을 가릴 때, 우리는 어떤 초월적 진리 대신 “세계의 공허함”을 본다. 벨라 타르는 구원이나 종말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끝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무기력과 집요함을 응시한다.

벨라 타르의 카메라는 세계를 설명하지 않고 견딘다”고 했던가. 그 견딤의 리듬이 바로 사탄탱고의 바람이다.

구원의 반복, 혹은 반복의 구원

《사탄탱고》는 세계가 이미 무너진 후에 남은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벨라 타르의 인물들은 떠나려 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를 맴돈다. 소녀는 죽음을 택하고, 마을 사람들은 춤을 추며, 남자들은 끝없는 길을 걷는다. 그들의 행위는 모두 다르지만, 같은 원 위에서 회전한다.

이 영화가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두 작품 모두 ‘길’과 ‘떠남’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결핍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라 타르는 그 결핍을 치유하지 않는다. 그는 결핍을 세계의 본질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견디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탱고》의 세계는 절망적이지만, 동시에 깊이 인간적이다. 그 속의 인물들은 모두 실패하지만, 실패 속에서만 가능한 어떤 ‘존재의 진실’을 드러낸다. 바람 부는 흙길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 사탄의 음악이 끝나지 않는 한, 인간의 탱고 또한 멈추지 않는다.

글:백학기
시인, 영화감독으로 <삼류극장에서 2046>등 시집 5권을 상재했으며 <이화중선>등 장편독립예술영화를 제작 감독했다. 섬진강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올해 <저만치, 가까이>등 2부작 독립영화를 제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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