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퇴임하는 주기창 고성군 문화원장…”문화원 정체성 세운 게 큰 보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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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임해 보니 말이 아니었죠. 정말 하코방 같은 구조에 직원 2명이 전부였습니다.제대로 돌아가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문화원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부터 착수했죠” 주기창 고성군 문화원장은 8년전 취임 당시를 그렇게 회고하면서 말문을 열었다.올 6월  2번 연임하면서  8년간 재임한 고성군 문화원장직을 마무리 한다.

그는 문화원의 정체성 확립을 통해 발전의 기틀을 잡은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 군청 재직시 유럽에 가보면 문화원이 잘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 나라는 다  품격있고 멋지게 살더군요. 고성군 문화원의 모습이  우리의 서글픈 모습이라는 인식 아래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당시까지 고성군 문화원은 단체수준이었다. 자연 지원이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그는 단체로 돼 있는 문화원을  기관으로 격상시키는 작업에 들어가 예산 배정이 되도록 하는데 수완을 발휘했다.그 결과 지금  문화원은  명실상부한 지역문화의 중심으로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상근 직원도 6명이고 토요일 일요일에도 프로그램이 가동된다.귀촌한 분들도  다수 참여해 활기가 넘친다.

열혈남아 주기창 원장은  고성 토박이다. 원래 두메산골 죽왕면 마좌리가 고향이다. 지금은 없어진 마을이지만  6.25 무렵만 해도 60여호의 큰마을이었다.해방이되고 38이북으로 편입돼 공산치하에 있었다.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집안도 넉넉했다. 그게 눈에 가시였고 그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전쟁이 나자 피난을 가서 다니기 시작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인흥초교등 6번 옮겨가면서 졸업을 할 정도로 해방과 전쟁기간은   질곡의 시간이었다.그후 그는 고성군청 공무원으로 입직해 기획감사실장과 부군수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명예로운 공직생활을 마쳤다. 워낙 친화력에 추진력이 있어  재임시 일화도 많다.

그는 이같은 공직경험을  밑바탕으로  문화원의 기틀을 잡는 여러가지 과업을 완수했다.고성이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라는  사료를 발굴해 간성 달홀공원에 추모탑을 세웠다. 20여년간 간행되지 못했던  고성군지를  재 집대성해서 발간했고 문화원 40년사도 펴냈다. 문화는 결국 기록에서 축적돼 간다는 일념하에 소리 소문 없이 추진한 성과물이다. 수성문화제 주최 기관으로서 겉치레  행사를 과감하게 수술하고 지역문화 중심으로 알차게 꾸몄다. 자연 예산도 절감하고 지역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

“이제 후진들에게 물려줄 때가 된거죠.” 문화원장은 3선까지 가능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는 결단을 내렸다. 5월에 후임 문화원장 선거가 있다. “지금 문화원이 제 기능을 하기에는  많이 좁습니다.문화원을 큰 곳으로 옮기는 것까지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후임자에게  미뤄야죠.”

그는 말한다. “상설전시 공간을 확보해서 고성의 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보고 자부심을 느끼도록하는 역할을  문화원이  매개해 주는 게 필요하고 그래서 문화원의 독자적인 공간 확보가 절실합니다.”

공직에서 나온지 23년  8순의 나이지만 아직도 청년의 기백이 넘친다.마을에서 뜻이 맞는 분들과 자체적인 반상회를 개최해 의견을 나누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고  틈틈이 운동도 즐긴다. 한창때 보다 못하지만 친구들과 술잔도 종종 기울이면서  유쾌하게 지내는 게 건강비결이라고 한다.

“문화원은 주민들의 사랑방입니다. 고령화 시대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하면서  윤택한 생활이 되도록 하는 문화원 본연의 사명은 더욱 중요해지죠” 8년간 고성문화원 재도약의 제도적 주춧돌을  확립하며 많은 일을 하고 떠나는 주기창 원장, 100세 시대 알찬 삶의 설계도를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글 :김형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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