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회화적 사유도 마찬가지다. 대상을 캔버스에 옮겨놓는 과정에서 무수한 질문이 녹아내린다.
김정호의 울산바위는 사유의 운동장이다. 그는 울산바위를 풍경의 자리에서 끌어내 캔버스라는 광장에 세운다. 그리고 터치하고, 세우고, 묻는다. 장엄한 바위의 깊은 골짜기와 높은 암봉, 고동치는 능선의 굵직한 마디들을 깊고 묵직하게 처리한다.
요즘 그의 울산바위는 색감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혹독한 여름을 통과하면서 캔버스의 색은 오히려 더욱 단조로워졌고, 구도는 한층 심플해졌다. 그렇다고 색채가 단선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흰색과 회색, 밝음과 어둠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의 선상에서 그의 붓질은 오히려 더 깊은 사유의 골짜기로 내려간다.
설산을 하얗게 칠하고 바다를 푸르게 칠하는 단순한 어법을 넘어선다. 그가 붙잡는 것은 색채의 재현이 아니라 모호함 속에 존재하는 질문이다.
사유는 본래 모호하다. 회의하고, 묻고, 다시 묻는다. 김정호는 그 일련의 행위를 캔버스 위에서 과감하고 역동적으로 진행한다.
흥미로운 것은 화면 아래 놓인 두 개의 다리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구조물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다리마저 흰색과 회색 속으로 녹아들면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흐려진다.
김정호는 이 그림에서 울산바위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울산바위가 무엇인지 묻는다.
흰색과 회색 사이, 푸른색의 작은 흔적 사이에서 질문은 계속된다. 산은 산으로만 존재하는가. 인간은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 화면의 단순함은 비어 있음이 아니다. 수많은 것을 덜어낸 뒤 남은 사유의 밀도다.
그는 담대하다.
말수가 적고 가끔 툭툭 던지는 말투에서 금언 같은 경구가 튀어나온다. 그림을 그리는 태도도 그렇다. 묵언 수행하듯 침묵하지만, 붓을 들면 찰나같이 색의 마술을 부린다.
그는 빠르다. 그리고 반복하지 않는다.
침묵의 골짜기에서 들고나온 색을 일순간에 화면에 처리해낸다. 덧칠하고 다시 구성하는 방식에 기대지 않는다. 한 번의 붓질에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걸어버린다.
그렇게 사유가 날카로워지는 모습을 그는 일련의 겨울 울산바위에서 유감없이 보여준다.
단순하지만 깊어지는 사유의 캔버스. 그는 그 화면을 호령한다.
혼탁한 세상사에 대한 마음의 심산함일까. 혹은 피안으로 가는 미지의 도정일까.
최근 몇 점의 울산바위에서 펼쳐 보이는 흰색과 회색빛의 경계는 유난히 모호하다. 설산과 바위, 빛과 어둠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든다.
그 모호한 화면 앞에서 우리는 존재의 거대함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거대함 앞에서 잠시 방황한다. 무엇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때 김정호의 붓끝은 미세하고도 감각적으로 작동한다.
거대한 울산바위를 다루면서도 붓질은 오히려 섬세해진다. 색을 덜어낼수록 감각은 예민해지고, 화면을 단순화할수록 사유는 깊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김정호 회화가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지점을 만난다. 단순성의 미학이다.
덜어내고 비워낸 화면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최근 울산바위가 보여주는 힘이다.
울산바위는 그렇게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장엄한 산이면서,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친구 같다. 세상사가 버겁고 마음이 어지러운 날, 말없이 바라볼 수 있는 친구.김정호의 울산바위가 시름을 조금 덜어주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신창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