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고동포’ 운봉리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이근옥…왜 일제는 그에게 4년 중죄를 선고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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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토성면 운봉리에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근옥(李根玉·1884~1959)을 비롯해 김연수·문명섭 등 애국지사를 기리는 숭모공원이 있다. 한 마을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곳은 지금도 태극기가 펄럭이는 ‘태극기 마을’로 불린다.

그 가운데 이근옥의 행적은 유난히 눈에 띈다.

그는 이름난 중앙의 거물급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가 그에게 내린 형량은 가볍지 않았다.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37세였던 이근옥은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으로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항소가 기각됐다.

왜였을까.

그의 행적을 따라가면 이유가 드러난다.

이근옥은 1919년 4월 중순 토성면 교암리와 운봉리 성대리, 죽왕면 오호리 광산리등의 게시판과 길목에 만세시위를 고무하는 ‘충고동포’라는 제목의 격문을 붙였다. 조선 민족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 의사를 밝히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만세운동 참여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확산시키는 선전활동이었다.

그해 10월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던 국내 비밀결사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김연수·문명섭·이석규 등을 동지로 규합했다.

더 나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직접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동지들과 함께 상해행을 추진했다. 철원을 거쳐 서울까지 올라갔지만 애국단 본부와 연락이 끊기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그러나 이근옥은 포기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귀향한 뒤에도 혼자 서울에 남아 상해로 갈 방법을 찾았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나섰다. 1920년 2월에는 고성 건봉사 주지와 승려에게 편지를 보내고 직접 찾아가 상해행 여비와 임시정부 군자금을 요청했다. 독립을 위해서는 생명과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취지였다.

군자금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 체포됐고 징역 4년의 옥고를 치렀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함께 재판을 받은 동지들과의 형량 차이다. 당시 김형석은 징역 6개월을 받았고, 김연수·문명섭·이석규 등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반면 이근옥에게는 4년이라는 중형이 내려졌다.황기중 위원장은 “석방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심해 장독대 큰독을 업어 놓고 독속에 숨기곤 했던 가족들의 불안감은 짐작으론 그 심정을 해아리기 어려울 정도 였다.”고 전했다.

이근옥은 단순한 만세운동 참여자가 아니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고 조직과 자금을 연결하려 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근옥에게 내려진 4년형은 그런 의미에서 당시 일제가 그의 활동을 얼마나 위험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록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은 것은 후대의 평가 때문만은 아니다. 2007년 운봉리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이근옥·김연수·문명섭 김형석 이석규 다섯분의  애국지사를 기리는 ‘애국지사 구국충정 숭모비’를 세웠고, 이후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태극기 마을 운봉리에서는  황기중 위원장의 인도로  숭모문화 별빛축제가 20회
이어지고 있다.

운봉리 숭모공원에 서 있는 이근옥의 이름은 그래서 단순한 추모의 대상이 아니다.

3·1운동의 함성이 끝난 뒤에도 독립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 지역 청년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일제가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이다.

설악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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