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조각 칼럼) 관용은 내편 네편 ‘누구냐?’보다 어떻게 처신하며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0
160

이렇게 행한 자 누굴까? 아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또 피해자는 잘 살고 있을까? 재판 결과는 모르겠지만 이런 류의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궁금함이다.

당한 당사자이거나 당신의 딸이, 당신의 손녀가, 가까운 이웃이라도 이처럼 당했는데 의지와 관계없이 수시로 대하는 상황이라면 이 범죄자를 어떻게 봐야할까? 흘러간 과거라고 두둔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뉘우치고 착하게, 성실히, 봉사하며 살고 있다면 과거의 죄는 미워도 삶에 대한 용서와 갱생의 현재를 나무랄 수 없다. 이점은 우리 사회가 이미 포용적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척 공공연히 사회적으로 자신을 의도적이고 과다하게 드러내며 살고 있다면 옹호할 수 있겠는가?오히려 이보다 위중하지 않은 학교폭력(학폭)에 연루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인생 진로의 대입 기회마저 박탈하는 교육부 대입 제도는 괜찮은가?

내편 네편 ‘누구냐?’보다 어떻게 처신하며 살고 있느냐가 관용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글:이만식 교수(경동대 부총장)

댓글 작성하기!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이름을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