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식 교수의 조각시 산책 31) 영화 ‘시’ 에서의 살구 / 이창동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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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어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ㅡ 영화 ‘시(詩)’ 에서 미자의 시 / 이창동 감독

The apricot casts itself to the earth,
broken, then trampled,
for the life yet to come.​
ㅡ from the film ‘Poetry’, Mija’s poem /
director Lee Chang-dong​​

♤ 조각 평설
이창동 감독의 5번째 영화 ‘시’에서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써보고자 하는 미자(윤정희 분)가 떨어진 살구를 보며 지은 시이다.

알츠하이머병으로 무너져가면서도 손자가 저지른 비극적 범죄를 무마하기 위해 돈을 구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추악함과 폭력성을 겪는다. 피할 수 없는 잔혹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가 유일하게 평화를 얻는 시간은 아름다운 시를 대하고 쓰는 순간이다.

​시에서 ‘다음 생’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딛고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시’를 쓰는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미자의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일체화함으로써 시는 ‘아름다움’이 아닌 ‘진실’임을 행간에 갈무리해 두고 있다. 그것도 ‘스스로’ 추구해야만 진정한 재생과 구원임을 전제한다. 예술은 고통을 외면하는 장식이 아니라 고통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힘임을 미자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죽어가는 순수 예술의 존재 가치와 의미까지 되묻는다.

이 짧은 시는 영화 전체의 주제를 응축하면서, 실존주의 철학이나 불교의 12연기(緣起)로 해석을 확장할 수 있을 만큼 깊이가 있다. 독자분들의 몫으로 넘긴다.

한편 필자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하필이면 수많은 열매 중에서 살구일까? 이창동 감독은 살구의 꽃말인 ‘처녀의 수줍음’이 미자 이미지와 겹치고, 한자어 속칭이 살구殺狗(‘개를 죽인다’는 뜻, 실제로 열매인 행인杏仁에 독이 있음)여서 역설적 의미를 담아 채택한 게 아닐까?
※ 이창동: 안동 본향,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소설 〈전리> 당선,《초록물고기》영화 감독 데뷔,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버닝》등 감독, 각국 영화제의 수상, 대한민국 대표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손꼽힘.

ㅡ 평설: 이하(李夏. 이만식) / 번역: 김경미(경동대학교 온사람교양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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