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기의 글쓰기) 겨울 바다서 건져 올린 프랑스 작가 뒤아팽의 문장들…차갑고 깊고 무심한 속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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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일으키는 간결한 문체, 심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스위스 문학상 로베르트 발저 상 수상! 프랑스 문필가협회 신인상 수상!

엘리자 수아 뒤아팽의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은 바로 그 얼음 아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쓰인, 드문 감각의 소설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화라는 외적 사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2025년이라는 현재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감정 기후, 그리고 ‘혼혈’, ‘경계’, ‘타자의 시선’이라는 키워드가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초라는 도시는 더 이상 관광 홍보물 속의 풍경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속초는 어느새, 한국 문학 안에서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가장 날카롭게 비추는 하나의 상징적 좌표가 되었다. 뒤아팽의 이 소설은 그 좌표 위에 세워진 작은 겨울의 집이다. 인물의 대화는 드물고, 사건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문장은 고요한 겨울 동해처럼 밀도 높고 깊게 움직인다. 겨울의 감각, 파도의 냄새, 국경과 언어가 빚어내는 정서적 진동, 그리고 무엇보다 신체의 존재감—이 모든 것이 정제된 문장의 리듬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다는 행위’가 곧 ‘머무르는 행위’가 되는 드문 소설이다.

1. 두 개의 바다, 한 명의 작가: 노르망디와 속초가 만들어낸 문학적 기원

엘리자 수아 뒤아팽은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다. 그녀는 열세 살 때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고, 그때 처음 마주한 속초의 바다는 자신이 어릴 적 자라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과 묘하게 닮아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말한다. 이 ‘어깨를 스치듯 닮은 두 바다’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심상적 원천이 되었다.

노르망디의 겨울 바다는 회색빛에 가깝고, 잔잔하지만 차갑다. 바람은 깊게 파고들고, 사람의 체온을 순식간에 빼앗아간다. 뒤아팽이 묘사한 속초의 바다는 그와 정확히 대칭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차갑고, 건조하며, 깊고, 무심하다. 뒤아팽은 이 두 풍경이 서로를 반사하는 ‘두 개의 거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 북부의 회색 조도, 낮은 태양, 짭조름한 바람, 그리고 묵묵히 밀려오는 파도의 단조로운 리듬. 속초의 겨울 바다는 그 모든 요소를 다른 문화적 층위 속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이런 배경을 가진 작가가 속초라는 도시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녀에게 속초는 ‘타인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풍경’이다. 완전히 속하지도,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은 이중의 감정. 그리고 바로 그 애매한 감정이 그녀의 문장에 독특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결코 한국을 낯선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혼혈이라는 신체적 정체성’과 ‘국경이라는 존재적 조건’을 소설 속 화자의 일상 속에 스며 있게 한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직접 인용을 보자.

“프랑스인 아버지가 엄마를 유혹하고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린지 23년, 나의 혼혈은 온갖 쑥덕거림의 근원으로 남아 있었다.”

이 문장은 화자의 신체와 정체성이 이 소설의 중심축임을 명확히 말해준다. 뒤아팽은 자신의 뿌리와, 그 뿌리가 남긴 상처의 감각을 소설의 정조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다. 정체성의 상처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감각적 겨울 풍경 속에 조용히 숨겨 넣는 방식으로 말이다.

2. 인물의 체온: 고요한 겨울 서사 속 미세한 감정의 움직임

2-1. 첫 만남 — 길 잃은 남자, 길을 잃은 감정

소설은 프랑스에서 온 중년 남성 얀이 속초의 작은 여관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첫 문장은 너무나 유명하고, 단번에 겨울의 분위기를 압축한다.

“그는 모직 외투를 걸친 채 길을 잃은 사람처럼 도착했다. 그는 내 발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었다.”

이 문장만으로도 독자는 얀이 이 도시의 공기와 이미 어긋나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는 여행자이지만, 동시에 도망자에 가깝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몸짓과 시선이 그 불안을 대변한다.

2-2. 속초의 겨울 —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소설의 화자는 속초를 이렇게 말한다. “속초는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찾는 도시다. 그래서 미리 말해두지만 겨울에는 별로 할 것이 없다.”

이 문장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이 소설의 구조 전체를 예고하는 문장이다.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할 일’이 거의 없다. 사건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없음’ 속에서 인물의 감정은 가장 미세한 방식으로 변한다. 얀과 화자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 바다를 보고, 식사를 하고, 어긋나고, 다시 조용히 마주 앉는다. 이 느린 리듬은 겨울이라는 계절의 시간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2-3. 바다가 감정을 비춘다 — 노르망디와 속초의 파동

얀은 바다를 오래 바라본다. 화자도 바다를 바라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일한 바다를 전혀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화자에게 속초의 바다는 오래된 집처럼 익숙하다. 그러나 얀에게 속초의 바다는 어딘가 불편하고 위협적이며, 동시에 그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타자의 공간이다.

여기서 작가의 배경이 다시 한 번 작동한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바다에서 자라난 소설가가, 속초의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두 바다가 서로를 비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은 작품 해석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3. 비무장지대로 향하는 길 — 국경과 신체의 리얼리티

소설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는 얀이 비무장지대(DMZ)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는 부분이다. 얀은 DMZ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요청은 관광적 호기심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만화 속 인물의 ‘결정적 장면’을 DMZ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DMZ는 단순한 지정학적 공간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DMZ는 ‘경계’, ‘단절’, ‘부재’, ‘신체’라는 주제가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화자는 얀과 함께 DMZ로 향하지만, 그들의 이동은 관광이 아니라 상호 고독을 응시하는 시간에 가깝다. 이 장면은 소설 속에서 국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국경은 지리적 선이 아니라, 정체성과 감정의 선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화자는 이미 국경의 존재를 몸으로 알고 있다. DMZ는 그 신체적 경험의 상징적 극점이다.

4. 작가의 배경이 소설의 문장을 만든다 — 혼혈, 언어, 신체의 감각

뒤아팽의 문장은 매우 절제되어 있고, 감정의 표현이 드물다. 그러나 그 절제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잔향은 강렬하다. 그의 문장은 한국 문학의 감수성과도, 프랑스식 서정성과도 조금 다르다. 이 둘을 섞어놓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결을 만들어낸다.

화자는 한국어와 프랑스어의 경계에 서 있다. 그녀의 신체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늘 ‘어디에도 완전히 포함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경험이 그녀의 문장을 구성한다.

이 소설에서 정체성은 이념적 논제가 아니다. 정체성은 피부의 촉감, 바람의 냄새, 식당의 불빛, 바다의 온도처럼 감각적 층위에서 존재한다.

5. 겨울의 여백 — 사건보다 감정의 기후를 읽는 방식

『속초에서의 겨울』은 사건을 중심으로 읽으면 금세 끝나버리는 소설이다. 그러나 감정을 중심으로 읽으면, 이 소설은 거대한 감정의 지도가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지 않는다. 얀과 화자는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오해하며,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가 소설의 아름다움이다.

이 소설은 이해를 통해 친밀함을 구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생겨나는 고독과 떨림을 기록하는 이야기다.

6. 속초라는 공간 — 2025년에 다시 의미를 갖는 이유

2025년의 한국에서 속초라는 도시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진다. 관광 도시이면서 동시에, 뒤아팽의 소설 이후 ‘내면적 풍경의 도시’로 재탄생했다. 작품이 출간된 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속초의 겨울 바다는 한국 사회의 감정적 기후를 투명하게 반사한다. 젊은 세대의 정체성 문제, 경계성, 디아스포라적 감각, 상처의 미학—이 모든 것이 작품 속 화자의 감정 체계와 겹쳐 보인다. 『속초에서의 겨울』은 설명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은 ‘느끼는 방식’에 관한 소설이다. 겨울을 감정의 시간으로 이해하는 독자에게 이 작품은 깊고 오래 남는다. 이 소설은 거대한 서사 없이도 감정의 진동을 만들어내는 드문 작품이다.

속초의 겨울 바다는 여전히 말수가 적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오래된 고독의 파동을 듣는다. 그리고 그 파동 속에서 자신이 가진 경계의 체험을 다시 생각한다. 엘리자 수아 뒤아팽의 『속초에서의 겨울』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겨울의 침묵을 다시 듣는 일이다. 우리는 그 침묵을 필요로 한다.

2025년의 지금, 그 침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다.

글:백학기( 시인.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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