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아웃사이더 그러나 역사의 승리자 (3)…벼슬 안하고도 평가받는 조선 실학자 성호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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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경훈

성호 이익(1681~1763) 선생은 실학의 대가이자 조선 후기의 대단한 학자로 후대의 평가가 높다. 그러나 이분이 벼슬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의외로 드물다. 80세 넘어서 임금이 하사한 명예직 빼고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사실 성호 선생은 출생부터가 고난의 삶이었다. 이분은 평안도 운산이란 곳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하전은 귀양간 상태였고 나이는 55세였다. 지금도 55세에 조부모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시대에는 결혼을 일찍 했으니 40대에도 조부모가 될 수 있었다. 형들과는 이미 20년 넘는 나이차가 있어서 당시로선 사실상 부자(父子) 뻘이었다. 아버지 이하전은 성호가 태어난지 1년 후에 돌아가셨고, 성호는 어머니와 형들 손에서 자랐다.

특히 둘째형 이잠은 성호 선생에게 글을 가르쳤으니 사실상 아버지 같았다. 선생은 25세 때 1차 시험 격인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이름을 쓰는게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떨어졌다. 선생의 아버지같고 멘토였던 형 이잠은 남인으로 장희빈을 편드는 상소를 올렸다가 고문을 받고 죽게 되었다. 이로써 성호 선생은 과거와 벼슬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아버지와 둘째 형의 당쟁으로 인한 죽음. 이로 인해 성호 선생은 벼슬의 길에 나아가는 대신, 자기 수양과 학문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아마 본인마저 당쟁에 희생된다면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생각도 작용했으리라…성리학을 바탕으로 남인이므로 퇴계 선생의 글과 학문을 연구하였고, 지금의 경기도 안산의 집안에 전해오던 수천권의 책을 바탕으로 연구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성리학을 넘어 실증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실학(實學)을 개척했다.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33세인 1713년에 아들을 얻었는데, 맹휴(孟休)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때 선생께서는 맹자(孟子)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맹자께서 선물을 주셨다’ 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선생은 벼슬을 못했지만 학덕(學德)은 높아서표암 강세황, 순암 안정복, 채제공 등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아들 이맹휴는 선생과 생각이 달랐는지, 과거를 봤고 장원 급제를 했다. 지방의 고을 수령도 한다. 하지만 39세의 나이로 그만 병에 걸려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아들을 잃은 슬픔은 얼마나 컸을까… 선생은 그럴수록 더욱 학문에 매진했다.

<성호사설>은 일종의 성호 전집이라 할 수 있다. 말년의 성호 선생이 자신의 글을 정리했고 수제자인 순암 안정복 선생이 이를 손봤다. <성호사설>의 서문(序文)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호사설>은 성호옹(星湖翁)이 장난삼아 쓴 것이다. 옹이 이 사설을 지은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별다른 뜻이 없다. 뜻이 없다면 왜 이런 설을 지었는가? 옹은 한가로운 사람이다. 독서와 여가와 세상살이를 하면서 이리저리 읽고 듣고 보고, 웃고 즐길만하며 옆에 두고 열람할만한 내용을 붓 가는대로 적어두었는데, 어느덧 많이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한가로운 사람이 뜻 없이 지은 것 치고는 매우 방대하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저술이 <성호사설>이다.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당 태종에 맞서 승리했던 안시성의 위치와 고려 시대 윤관 장군의 동북 육성과 두만강 건너 선춘령에 있는 비석의 위치를 고증했다. 성호 선생의 노력으로서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에 맞서 우리의 역사와 영토를 고증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얻게 되었다.
또한 동시대 인물인 독도 지킴이 안용복 장군을 기록했다. 성호 선생은 안용복을 칭찬하면서 만약 울릉도와 독도가 쓸모없다고 버리면 왜인(倭人)들의 소굴이 되어 조선의 국방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으며 안용복의 행동이 나라를 구했다고 칭찬했다.

성호 선생은 더욱 놀라운 통찰을 했다. 당시의 일본은 천황이 있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예인 도쿠가와 막부(幕府)의 쇼군(將軍)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성호 선생은 놀라운 예언을 한다.

“만약 일본 사람들 중에 뜻 있는 자들이 천황을 도우며 천황의 권력 복귀를 내세운다면 일본 전역의 태수들 가운데 호응 안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실제로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일어나서 막부가 해체되고 천황의 왕정복고가 일어난다. 성호 선생의 예언은 이제 한일관계의 미래에까지 미친다.

“일본은 천황인데 우리는 왕이니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지금 우리 조선의 대신들은 쇼군이 왕인줄 알고 있으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실제로 메이지 유신 직후에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왕정복고를 통보했는데, 조선에선 ‘천황’이란 명칭을 문제삼으며 이를 받지 않았다. 이에 적대감이 생긴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을 시작으로 조선을 침략해간다. 물론 일본이 조선 침략의 뜻이 있었지만 조선 조정의 안일한 대응이 그들에게 명분과 빌미를 줬다고 하겠다.

필자는 상상을 해본다. 만약 성호 선생께서 벼슬을 하셨다면 어떻게 역사가 전개되었을까? 역사가 지금보단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그러나 성호 선생께선 벼슬 대신에 본인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시면서 83세까지 장수하셨다. 성호기념관의 관계자는 18세기 당시에 83세까지 사신 것은 지금 100세 넘게 장수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지금의 사회는 과거 벼슬을 얻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 행복과 영리 추구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굳이 공직이 아니더라도 한 개인으로서 성호 선생은 국가와 사회, 역사를 위해 분명 최선을 다하셨고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또한 개인적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지혜를 후세에 전하셨다.
그분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가 공심(公心)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을 감히 가져본다.

글:강경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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