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아웃사이더, 그러나 역사의 승리자(1)…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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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강경훈

퇴계 이황은 대한민국 1000원 지폐의 모델이며, 한국 철학의 큰 인물로 오늘날 추앙받고 있다. 이분께서 왜 아웃사이더인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퇴계 이황은 당대의 최고 학자였지만, 삼정승 같은 고위직의 벼슬을 지내지 않았다. 가장 높은 벼슬은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학교 총장 같은 지위였다. 그마저도 건강과 조상의 묘를 돌볼 것을 핑계삼아 사직하였다.

그 당시의 임금은 퇴계를 벼슬에 등용했지만, 그 벼슬을 사직한 것도 수십 차례에 이른다. 오늘날에도 그렇고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중시한다. 그 당시는 왕조 시대였고 왕의 명령이 지엄했었다. 그러나 퇴계 선생은 왕의 부름도 대부분 물리쳤다. 퇴계는 왜 그랬을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것일까?

많은 학자들이 ‘사화 때문에 형을 잃었고 사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라고 해석들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퇴계가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고 고향에 틀어박혀 고고하게 풍류를 즐겼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퇴계학의 권위자 교수님은 다르게 풀이하였다.퇴계 선생은 철저히 수기(修己)를 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수기(修己)란 무엇인가?

유교의 경전인 대학(大學)에 보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그중에 가장 기본은 수신(修身), 자기 몸을 닦는 것이다. 수신과 수기는 같은 말이다.자기 수양을 하는 것이다. 자기 수양을 하고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자기 수양을 안 하고 자기 가정을 못 다스리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얼마나 개탄스러운가?

그리고 한국 사회는 범죄와 비리가 늘어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일종의 성악설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이다.그러나 퇴계 선생은 성선설을 믿으셨다. 다만 성악설을 일부 수용하였다. 두 설을 통합했다. 퇴계 선생의 인간관은 ‘本善而易流惡(본래는 선하나 악으로 흐르기 쉽다)’ 이다. 퇴계 선생은 경(敬) 이라는 수양법을 강조하셨다. 필자는 현대식으로 풀이하겠다.

1. 매사에 대한 집중력을 기르고
2. 늘 정신적, 도덕적으로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고
3.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다스린다.

공자의 <논어>는 어렵다. 그러나 퇴계가 정리한 ‘본래는 선하나 악으로 흐르기 쉽다’ 라는 인간관을 통해서 보면 공자의 세상과 제자들에 대한 질타는 본래의 선한 본성을 지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퇴계는 이미 열 살 때 <논어>를 세상 사는 이치(理)로 해석하였다. 그 정도로 동양고전을 정독했고 마스터했다.

퇴계의 제자들 중에 서애 류성룡이 나왔고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극복하는데 큰 일조를 했다. 하지만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을 제외하고는 그의 제자, 학파, 후손들은 큰 벼슬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남인이었고, 서인 노론이 인조반정 이후 조선 멸망 때까지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퇴계의 후손과 학도들은 학문에 정진했고, 그들 중 일부는 독립운동에도 투신하였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인품과 학덕은 길이 인정받아 노론이 집권하던 시기에도 문묘 18현이라는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 18인에 선정되어 종묘에서 제사를 지냈다.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에선 대한민국 역사의 정신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세종대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신사임당을 선정하여 지폐의 모델로 새겼다.

퇴계는 고위직 벼슬을 포기하고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퇴계의 이름을 알지만 그분의 진정한 삶과 사상을 모른다. 그분이 추구했던 수기(修己)와 경(敬)의 정신을 제대로 되새긴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평화로워질 것이라 확신한다.

글:강경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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